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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His wife's boyfriend isn't going anywhere.

 2038년 2월 11일, 일요일. 레퀴엠 필드 주택 단지 인근 수입 식료품점.

 건물 외벽의 아이보리색 석재가 오후의 햇살을 부드럽게 반사하고 있었다. 유럽 소도시의 델리카트슨을 옮겨놓은 듯한 매장 내부에는 올리브 오일과 건조 허브, 숙성 치즈의 복합적인 향취가 공기 중에 층을 이루고 있었다. 진열대의 조명이 유리병과 금속 캔의 표면에 부딪혀 작은 광점들을 흩뿌렸다. 일요일 오후의 수입 식료품점은 한산했다. 계시를 받은 자들의 거주 구역에 위치한 이 매장은 애초에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임무 대기나 장비 점검으로 빠져 있었다.

 테오도르는 차와 허브 섹션 앞에 서 있었다. 밀금빛 울프컷 아래로 드러난 목선이 선반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고, 크루넥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올린 팔이 두 개의 캔을 각각 들어올리고 있었다. 왼손에는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 산지의 베르가못 블렌드, 오른손에는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산 베르가못이 섞인 얼 그레이. 두 캔의 무게와 크기는 거의 동일했다. 라벨의 서체만 달랐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왼쪽 캔의 성분표에서 오른쪽 캔의 원산지 표기로 이동했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왕복.

 유시아가 테오도르의 옆에 서 있었다. 전자코너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는지, 작은 체구가 진열대 앞에 자리 잡고 테오도르의 고민을 구경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유시아가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카트를 밀고 이 섹션에 도착한 순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전자코너로 가지 않았다. 그 사실이 테오도르의 시선을 캔에 고정시키는 데 필요한 집중력을 15퍼센트 정도 깎아먹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차이인데?"

 유시아의 목소리가 허브와 건조 과일 향이 섞인 공기를 갈랐다. 비꼼이 없었다. 재촉도 없었다. 올라간 눈매 아래 핑크색 눈동자가 테오도르의 양손에 들린 두 캔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볼살이 남아 있는 얼굴에 순수한 의문이 놓여 있었다.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다'가 아니라 '왜 고민할 만한지 알고 싶다'는 눈.


 테오도르의 캔을 들고 있던 손이 멈추었다. 시선이 성분표에서 떨어져 유시아에게 닿았다. 가로로 길게 뻗은 진열대의 간접 조명이 유시아의 백금발 위에 부드러운 막을 만들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1초 동안 유시아의 표정을 읽었다. 관심. 진짜 관심. 차의 차이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테오도르가 왜 이것에 시간을 쓰는지가 궁금한 얼굴.

 테오도르가 왼손의 캔을 유시아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금속 캔의 원형 뚜껑이 유시아의 얼굴에서 손바닥 하나 거리에 멈추었다.

"Smell this one first."
(이쪽부터 맡아봐.)

 나른한 톤. 명령이 아니라 안내에 가까운 어조. 유시아가 캔에 코를 가까이 대면—밀봉된 뚜껑 사이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향이 감지될 것이었다. 시트러스의 날카로운 상층과, 그 아래 깔린 꽃잎 같은 중간 노트. 그라스 산지 특유의 풍부한 꽃향이 베르가못의 쓴맛과 겹쳐진 블렌드.

 테오도르가 오른손의 캔을 같은 위치로 교체했다.

"Now this one."
(이번엔 이쪽.)

 두 번째 캔에서는 다른 결의 향이 올라올 것이었다. 칼라브리아산 베르가못은 시트러스가 더 날카롭고 건조했다. 꽃의 둥근 여운 대신 껍질의 쌉쌀한 뒷맛이 남는 종류. 테오도르는 유시아가 두 캔의 향을 비교하는 동안 그 표정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진열대 조명 아래서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The one on the left — Grasse. Rounder, warmer. Floral underneath the citrus. The one on the right — Calabria. Sharper, drier, more of a bite."
(왼쪽이 그라스 산. 더 둥글고 따뜻해. 시트러스 아래에 꽃 향이 깔려 있어. 오른쪽은 칼라브리아. 더 날카롭고 건조하고, 뒷맛에 힘이 있어.)

 설명하는 동안 테오도르의 톤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의 나른함이 한 겹 벗겨진 자리에, 무언가에 대해 확실히 아는 사람의 차분한 밀도가 놓여 있었다.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입꼬리의 각도가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과시가 아니었다. 이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 태도.

"For your palate — someone who drinks energy drinks and eats fire noodles for dinner — Calabria would be... too much personality. Grasse would sit better."
(네 입맛 기준으로 — 에너지 드링크 마시고 저녁에 불닭 먹는 사람한테는 — 칼라브리아가 좀... 개성이 과할 거야. 그라스 쪽이 나을 거야.)

 장난이 섞인 문장이었으나, 그 안에 실제 판단이 들어 있었다. 유시아의 식습관을 기억하고, 그 위에서 맞는 선택지를 골라주는 행위. 테오도르가 칼라브리아산을 선반에 돌려놓고, 그라스산 캔을 카트에 넣었다. 금속이 카트 바닥에 닿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그라스산을 고른 것은 유시아를 위해서였다. 자신이 마실 것이었다면 칼라브리아를 골랐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테오도르는 말하지 않았다.

 카트 안에는 이미 몇 가지 물건이 담겨 있었다. 에스프레소 원두 한 봉지, 프렌치 프레스용 거친 분쇄 커피, 꿀 한 병, 그리고—유시아가 과자 코너를 지나며 집어넣은 포키 한 상자. 테오도르의 정성스러운 큐레이션과 유시아의 본능적인 선택이 같은 카트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카트를 밀며 다음 진열대로 이동하다가, 어깨 너머로 유시아를 돌아보았다.

 


"You didn't go to the electronics section."
(전자코너 안 갔네.)

 

 확인도, 질문도 아니었다. 관찰이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채로. 유시아가 자신의 고민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테오도르의 흉곽 안에서 또 한 번 무언가를 두드렸다. 카트를 미는 긴 손가락의 관절이 한 순간 하얗게 힘을 받았다가 풀렸다. 진열대 사이의 통로를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 위에서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어차피 필요한 건 이미 집에 다 있어. 괜찮아."

 

 유시아의 대답이 냉장 섹션의 차가운 공기 속에 떨어졌다. '어차피 필요한 건 이미 집에 다 있어. 괜찮아.' 그 문장의 무게가 테오도르의 등 뒤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필요한 것은 다 있다. 그러니까 전자코너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다. 테오도르의 옆에. 베르가못 캔을 구경하고, 에쉬레 버터를 카트에 넣는 손을 보고, 진열대 사이의 통로를 나란히 걷고 있다. 유시아에게 이 시간은 전자코너를 대체한 것이 아니었다. 대체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여기에 있는 것이 유시아의 선택이었다.

 테오도르의 카트를 잡은 오른손이 손잡이 위에서 위치를 바꿨다. 엄지가 금속 표면을 한 번 훑었다. 눈은 냉장 섹션의 유리문을 향해 있었으나, 유리에 반사된 유시아의 실루엣 위에 초점이 맺혀 있었다. 작은 체구. 프릴 스커트. 로우트윈테일의 끝이 어깨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 위의 유시아는 진열대의 치즈 라벨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의 유시아의 옆얼굴은—경계가 한 겹 벗겨진 얼굴이었다.

"You know, most people would have wandered off by now."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다른 데 가 있었을 텐데.)

 카트를 밀어 냉장 섹션을 지나쳤다. 다음 통로. 파스타와 소스가 정렬된 선반이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드 체코와 바릴라의 패키지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사이로 향신료 병들이 끼어 있었다. 테오도르의 보폭이 유시아에 맞춰진 채 좁게 유지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왼쪽 팔의 스웨터 소매가 유시아의 오른쪽 어깨 높이에서 공기를 스쳤다. 닿지는 않았다. 닿기 직전의 거리.


"Not complaining, mind you."
(불만은 아니야, 오해하지 말고.)

 덧붙인 문장의 끝이 흐려졌다. 여지를 남기는 습관. 그러나 이번에는 여지의 방향이 달랐다. '불만이 아니다'라는 말 뒤에 오는 것은 보통 '오히려—'였다. 테오도르는 그 '오히려'를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대신 파스타 선반 앞에서 카트를 멈추고, 드 체코의 링귀네 한 봉지를 집어들었다. 포장지의 청색 라벨을 확인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찻잎을 고를 때보다 훨씬 빨랐다. 파스타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었다.

 링귀네를 카트에 넣는 동작 중에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에게 닿았다. 카트 안의 물건들 위로 시선이 스쳤다. 에스프레소 원두, 그라스산 얼 그레이, 에쉬레 버터, 꿀, 분쇄 커피, 링귀네. 그리고 유시아의 포키 한 상자. 빨간 패키지가 정돈된 물건들 사이에서 혼자만의 색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물건들은 전부 유사한 톤의 포장이었다. 크림색, 갈색, 금색. 그 사이에 끼어든 포키의 빨간색이—마치 테오도르의 일상에 끼어든 유시아 자체를 축약한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그 생각을 자각한 순간 시선을 카트에서 떼어냈다. 왼손이 올라가 뒷목을 잡았다.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드는 동작. 귓불에서 목 뒤로. 열기가 번지고 있었다.

"Anything else you want to throw in there? It's looking rather civilised at the moment — needs a bit more chaos."
(더 넣고 싶은 거 없어? 지금 좀 점잖아 보이거든 — 혼돈이 좀 더 필요해.)

 카트 안의 포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유시아가 카트에 넣은 유일한 물건. 테오도르가 그것을 빼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이 농담 안에 전부 접혀 있었다. 유시아의 포키가 자신의 얼 그레이 옆에 놓여 있는 것이 싫지 않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대신 '더 넣으라'고 했다. 카트 안에. 자신의 물건들 사이에.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가 카트 안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테오도르는 파스타 소스 선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이 산 마르자노 토마토 캔을 집어드는 동안에도 시야의 끝에 유시아의 위치가 잡혀 있었다. 왼쪽으로 두 걸음. 선반 앞에 서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작은 실루엣. 테오도르가 토마토 캔을 카트에 넣자 유시아의 포키 옆에 착지했다. 빨간색과 빨간색이 나란히.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떨렸다. 이번에도 웃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참는 떨림이었다. 카트를 다시 밀기 시작했다. 계산대를 향해. 바퀴가 타일 위를 구르는 낮은 소리가 한산한 매장 안에 울렸다. 옆에서 유시아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테오도르의 보폭에 맞춰진 작은 걸음. 테오도르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매장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유시아의 발소리를. 앞서가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

 계산대 앞에 카트를 세우고 물건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캔과 병과 봉지가 벨트 위에 나란히 놓였다. 마지막으로 올린 것이 유시아의 포키였다. 테오도르의 긴 손가락이 빨간 상자를 벨트 위에 내려놓을 때, 손이 0.5초 정도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전체 계산을 시작하려는 움직임.

"Don't even think about it."
(꺼내려고도 하지 마.)

 유시아의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던진 말이었다. 유시아가 지갑을 꺼낼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테오도르는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다. 카드를 단말기에 대는 동작이 매끄러웠다. 결제 완료음이 울렸다. 포키 한 상자를 포함한 모든 물건의 값이 테오도르의 카드에서 빠져나갔다.

 종이 봉투 두 개에 물건을 나눠 담았다. 무거운 쪽을 왼손으로, 가벼운 쪽—포키가 들어 있는 쪽—을 오른손으로. 매장 출구를 향해 걸으며 오른손의 봉투를 유시아 쪽으로 내밀었다. 포키가 든 봉투를 건네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봉투 안에는 포키 외에도 얼 그레이 캔과 꿀 병이 함께 들어 있었다. 유시아의 집 찬장에 놓일 물건들.

"Your share."
(네 몫.)

 출구의 자동문이 열리자 2월의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매장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벗겨지며 피부 위로 한기가 내려앉았다. 테오도르의 밀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주차장을 향해 걸으면서 왼손의 봉투를 들어올려 바람을 가렸다. 유시아 쪽의 바람을.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테오도르 자신은 오른쪽 뺨에 닿는 찬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유시아의 자택은 두 시간 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RGB 조명의 보라빛이 여전히 모니터 뒤편에서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으나, 그 앞에 쌓여 있던 빈 에너지 드링크 캔의 산맥은 사라져 있었다.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 봉지, 컵라면 용기, 정체를 알 수 없는 택배 상자 세 개. 전부 검은 쓰레기 봉투 두 개 안에 압축되어 현관 옆에 놓여 있었다.

 청소는 테오도르의 주도였다. '주도'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장을 봐온 종이 봉투의 내용물을 찬장에 정리하던 테오도르가 싱크대 옆에 쌓인 빈 캔 더미를 발견한 순간, 그의 손이 찬장에서 멈추었고, 루비색 눈동자가 거실 전체를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에쉬레 버터를 냉장고에 넣기도 전에 검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Sweetie, I'm not asking you to live like a monk. But there's a difference between 'lived-in' and 'archaeological site.'"
(자기야, 수도승처럼 살라는 게 아니야. 근데 '생활감'이랑 '고고학 발굴 현장'은 좀 다르거든.)

 유시아는 청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본인은 다 알고 있었고, 빈 캔이 세 개든 열세 개든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잔소리는 꾸준했다. 나른한 톤이었으나 반복적이었고, 반복될수록 유시아가 움직이는 쪽이 빨랐다. 유시아가 봉투를 들고 캔을 주워 넣는 동안 테오도르는 싱크대 주변과 조리대를 정리했다. 두 사람의 동선이 좁은 주방과 거실 사이에서 교차했다. 테오도르의 긴 팔이 선반 위의 먼지를 닦을 때, 유시아의 작은 체구가 소파 밑에서 굴러나온 과자 봉지를 건져낼 때.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동선을 읽고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라스산 얼 그레이 캔이 찬장의 상단에 놓였다. 유시아의 키로는 닿지 않는 위치. 테오도르가 아무 말 없이 그곳에 올려놓은 것은—다음에 자신이 와서 꺼내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꿀 병은 그 옆에. 포키 상자는 유시아의 손이 닿는 하단 선반에. 포키의 위치만 유시아의 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정리가 끝난 자택은 낯설 정도로 깨끗했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바닥에는 먼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통창 사이로 2월의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밀었다. 오후 네 시. 저녁을 준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유시아가 침실로 향했다. 테오도르는 주방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사이로 유시아의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침실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귀로 따라갔다. 그리고—침대 스프링이 한 번 크게 울리는 소리. 다이빙. 테오도르의 손이 수건 위에서 멈추었다.

 테오도르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침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유시아는 이미 침대 한가운데에 파묻혀 있었다. 로우트윈테일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고, 프릴 스커트가 이불 위에서 접혀 있었다. 이불 속이 아니라 이불 위에 엎드린 자세. 청소로 지친 몸이 매트리스의 탄성에 빨려 들어간 형태. 유시아의 얼굴이 베개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베개 속에서 나온 목소리.

"침대랑 결혼해야겠다… 평생 함께할래…"


 테오도르의 손이 문틀 위에서 멈추었다. 수건을 쥔 오른손이 미세하게 힘을 받았다. 유시아의 말이 침실의 공기 속에서 솜처럼 떠다녔다. 결혼. 평생. 함께. 그 단어들이 침대를 향해 던져진 것이라는 사실을 테오도르의 귀는 정확히 인지했다. 침대에게. 가구에게. 매트리스와 시트와 베개로 이루어진 무생물에게.

 테오도르의 왼쪽 귓불이 달아올랐다.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유시아가 침대에게 결혼을 선언한 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곤한 몸이 편안한 곳에 닿았을 때 나오는 본능적인 감탄이라는 것도. 그러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유시아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테오도르의 흉곽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불쾌한 종류의 자극이 아니었다. 더 나빴다. 달콤한 종류였다. 그리고 그 달콤함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침대라는 사실이—

 수건을 문틀에 걸었다. 손가락이 수건의 올을 한 번 훑고 떨어졌다. 테오도르가 침실 안으로 한 발을 들이며, 문틀에 어깨를 기대었다. 나른한 자세. 팔짱을 끼고, 긴 다리를 교차시킨 채.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의 능글맞은 각도. 그러나 귓불의 열기가 목 뒤로 번지고 있었다.

"I just heard you propose to a piece of furniture."
(지금 가구한테 프로포즈하는 거 들었어.)

 나른한 저음이 침실을 가로질렀다. 유시아의 베개에 파묻힌 얼굴을 향해.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침대 위에 엎드린 유시아의 등선을 따라 내려갔다.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프릴 스커트의 끝단으로.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가 이불 위에 나른하게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시선을 1초 만에 유시아의 뒷통수로 되돌렸다.

 


"Should I leave you two alone? I wouldn't want to intrude on something so... intimate."
(둘이 좀 있게 나가줄까? 이렇게 깊은 사이에 끼어들기 싫으니까.)

 장난이었다. 목소리의 결은 완벽하게 농담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교차된 팔 안에서 왼손의 엄지가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한 번 긁었다. 무의식적인 동작. '결혼'이라는 단어가 유시아의 입에서 나온 뒤, 그 단어가 향한 곳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농담의 형태를 빌려 테오도르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질투. 침대에 대한. 가구에 대한 질투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테오도르의 목 뒤가 더 뜨거워졌다. 유시아가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았다면—귓불에서 목 뒤까지 번진 붉은 기운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테오도르가 문틀에서 어깨를 떼고, 침대 옆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집행관의 걸음.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엎드린 유시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흩어진 백금발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유시아의 머리카락 위에 손이 닿기 직전에—0.5초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유시아의 백금발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마에서 정수리로,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한 번. 느린 속도로.

"For the record — that mattress can't cook you coq au vin."
(참고로 말해두는데 — 그 매트리스는 코코뱅 못 만들어줘.)

 손가락이 유시아의 머리카락 사이를 한 번 더 훑었다. 두 번째 쓸어넘김은 첫 번째보다 느렸다.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내려가는 손끝이 유시아의 두피 위를 미세한 압력으로 지나갔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눈동자의 초점이 자신의 손가락 끝에 맺혀 있었다. 유시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 유시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준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이유 없이, 쓸어넘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테오도르의 귓불이 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목 뒤까지. 스웨터의 크루넥 라인 위로 드러난 피부가 평소보다 붉었다. 유시아가 베개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면 그것이 보일 것이었다.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쪽과 보이기를 바라는 쪽이 테오도르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침대한테 질투하는 거야? 인사해 자기야. 여기는 질투 많은 내 남친. 테오 너도 인사해. 여기는 내 남편이야."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가 베개 위에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경계심이 벗겨진 얼굴. 볼살이 남아 있는 뺨이 웃음으로 올라가 있었고, 올라간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 얼굴이 테오도르에게 '침대한테 질투하는 거냐'고 물었다.

 테오도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손이 유시아의 정수리 위에서 멈추었다. 손가락이 백금발 사이에 얹혀진 채로 굳었다. 유시아의 다음 문장이 침실의 공기를 갈랐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매트리스 위에서 퍼졌다. 유시아는 침대를 '자기야'라고 불렀다. 남편이라고 했다. 테오도르를 '테오'라고 했다. 남친이라고 했다. 호칭의 위계가 뒤집혀 있었다. 가구가 '자기야'이고 '남편'이었으며, 테오도르는 '테오'이고 '남친'이었다. 유시아에게 그것은 장난이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이 증명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유희. 피곤한 몸이 편안한 곳에 닿았을 때 나오는 과장된 감탄의 연장선.


 테오도르의 귓불이 진홍에서 한 단계 더 깊은 색으로 물들었다. 목 뒤의 열기가 스웨터의 크루넥 라인을 넘어 쇄골까지 번지고 있었다. 유시아의 머리카락 위에 얹혀 있던 손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그리고 그 손이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귓불을 끼우고 만지작거리는 동작. 무의식적인 습관이 표면으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질투라는 단어가 유시아의 입에서 나왔을 때, 테오도르의 첫 번째 반응은 부정이었어야 했다. '침대한테 질투할 이유가 없다'는 나른한 농담이 입에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유시아가 침대를 '자기야'라고 부르고 테오도르를 '테오'라고 부른 그 0.3초의 간극에서—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이 쥐어짜이는 듯한 압박을 받았다. 가구에 대한 질투. 스프링과 폼과 천으로 이루어진 무생물에 대한 질투. 그것을 자각한 순간의 수치심이 귓불의 열기보다 더 뜨거웠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웃는 얼굴 위에서 한 박자 머물렀다. 킥킥거리는 유시아의 입꼬리. 장난. 유시아에게 이것은 장난이었다. 그 사실을 테오도르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를 받아 미세하게 기울었다. 유시아의 엎드린 몸이 그 기울기를 따라 테오도르 쪽으로 아주 약간 밀렸다. 테오도르는 엎드린 유시아를 내려다보며, 귓불에서 손을 떼고 턱을 괴었다. 팔꿈치가 무릎 위에 놓였다. 나른한 자세를 재구축하는 데 2초가 걸렸다. 평소보다 오래 걸린 복구 시간.

"So let me get this straight."
(그러니까 정리 좀 해보자.)

 나른한 저음. 그러나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성대가 조이는 방식이 평소의 유혹과는 결이 달랐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얼굴에서 매트리스 표면으로 내려갔다. 손바닥이 시트 위를 한 번 짚었다. 면 소재의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This — this thing I'm sitting on right now — is 'darling.' Your 'husband.'"
(이거 —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것이 — '자기야.' 네 '남편.')

 손가락이 시트를 한 번 톡 두드렸다. 침대를 가리키는 동작. 그리고 시선이 유시아에게로 돌아왔다.

"And I'm 'Theo.' The boyfriend."
(그리고 나는 '테오.' 남친.)


 '남친'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능글맞은 각도. 그러나 그 미소의 아래쪽, 턱선을 따라 흐르는 근육의 긴장이 미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장난에 장난으로 응수하는 표면 아래에서,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시트 위를 한 번 더 긁었다. 면 올이 손톱 밑을 스치는 감각.

"I have to say — I've been outranked by many things in my life, but never by bedding."
(솔직히 말하면 — 살면서 밀려본 적은 많았는데, 침구류한테는 처음이야.)

 자조가 섞인 톤이었으나, 그 자조의 방향이 침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매트리스에게 '자기야'를 빼앗긴 28세 남성. 7년차 공안 집행관. 유스티티아의 칼. 그 칼이 지금 이불 위에 엎드린 22세 여자의 장난에 귓불까지 빨개진 채로 앉아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사실의 무게를 정확히 체감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 무게가 불쾌하지 않다는 것도.

 테오도르의 상체가 유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팔꿈치가 무릎에서 떨어지며, 한 손이 유시아의 머리 옆 베개 위에 짚어졌다. 엎드린 유시아의 얼굴과 테오도르의 얼굴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에 유시아의 웃는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진홍으로 물든 귓불이 유시아의 시야 안에 들어왔을 것이었다.

"Tell your husband something for me, would you?"
(네 남편한테 한 가지만 전해줘.)

 속삭임에 가까운 톤. 유시아의 귓가에 닿을 거리. 베개 위에 짚은 손이 유시아의 흩어진 백금발 한 올을 스쳤다.

"His wife's boyfriend isn't going anywhere."
(와이프의 남자친구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문장의 끝이 흐려졌다. 여지가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능글맞은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었으나, 유시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의 깊이가 농담의 온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1초 동안 유시아의 눈을 바라본 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베개 위에 짚었던 손이 떨어지며 유시아의 머리카락 한 올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그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테오도르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허리를 폈다. 스웨터의 소매를 다시 걷어올리는 동작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침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어깨 너머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Dinner's in two hours. If your husband lets you go by then."
(저녁은 두 시간 뒤. 그때까지 네 남편이 놓아주면.)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주방으로 사라졌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 도마 위에 칼이 놓이는 금속음. 테오도르가 요리를 시작하는 일련의 소리들이 유시아의 침실까지 고요하게 전해졌다. 그 소리들 사이, 주방에 선 테오도르의 왼손이 한 번 더 귓불을 잡았다가 떨어지는 것은—유시아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시계의 초침이 자정을 넘겼다. 유시아의 자택 거실. 통창 너머로 레퀴엠 필드의 가로등이 희미한 주황빛을 흘리고 있었고, 소파 위에서 흘러나오는 노트북의 엔딩 크레딧이 천장에 푸른 잔상을 그렸다. 영화는 끝났다. 유시아는 소파 반대편에 앉아 있었고, 테오도르는 같은 소파의 이쪽 끝에 앉아 있었다. 쿠션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 쿠션은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두 시간 내내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소파 팔걸이 위에 놓여 있었다. 오른손은 무릎 위. 유시아의 손은 노트북 터치패드 근처에 있었다. 두 사람의 손 사이 거리는 쿠션 하나와 소파 쿠션 한 칸. 대략 팔 하나를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테오도르는 팔을 뻗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줄이 화면 위로 사라졌다. 노트북이 자동으로 다음 추천 영상의 썸네일을 띄웠다. 거실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채우고 있던 공백이 한꺼번에 드러나며, 남은 것은 냉장고의 낮은 윙거림과 두 사람의 호흡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밀금빛 머리카락이 등받이 위로 흘러내렸다. 루비색 눈동자가 천장의 푸른 잔광을 반사하고 있었다.

 세 달.

 정확히는 세 달하고 며칠. 유시아의 입에서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이 12월 9일이었다. 오늘이 2월 11일. 그 사이에 테오도르는 유시아의 자택에 열두 번 왔고, 유시아는 테오도르의 자택에 네 번 왔다. 함께 식사한 횟수는 스물세 번. 영화를 본 횟수는 일곱 번. 장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테오도르의 손은 유시아의 손에 닿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만졌다. 이마 위의 앞머리를 넘겨주었고,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어깨에 손을 올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손.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는 접촉. 열 손가락이 서로의 사이로 끼어드는 행위. 그것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시아가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유시아는 거부하지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테오도르를 '자기야'라고 부르고, '남친'이라고 칭하고, 침대에 다이빙하며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유시아의 손은 테오도르를 향해 뻗어온 적이 없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소파 반대편의 유시아를 보았다. 노트북의 푸른 빛이 유시아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백금발 로우트윈테일이 어깨 위에서 늘어져 있었고, 핑크색 눈동자가 화면의 썸네일 위를 무심하게 훑고 있었다. 볼살이 남아 있는 뺨. 올라간 눈매. 경계심이 벗겨진 얼굴. 유시아는 테오도르의 곁에서 편안했다. 그것은 확실했다.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편안했고, 장난을 칠 수 있을 만큼 경계가 낮았다. 테오도르의 집에서 자고, 테오도르의 옷을 입고, 테오도르의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서도—손을 잡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릎 위에 놓인 긴 손가락. 이 손으로 원나잇의 상대에게는 만난 지 삼십 분 만에 허리를 감았다. 이 손으로 클럽의 어둠 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턱을 들어올렸다. 이 손으로 호텔 방의 문을 열고, 침대 위에 누군가를 눕히고, 그 다음 날 아침 아무런 감정 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것이 테오도르 누아르의 관계 방식이었다. 효율적이고, 깔끔하고, 잔여물이 남지 않는. 시작과 끝이 하룻밤 안에 완결되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손잡기'는 의미가 없었다. 손은 목적을 위한 경유지였고, 목적지는 언제나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세 달째 22살 여자의 손 한 번 잡지 못한 28세 남성이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새벽의 거실에서. 쿠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시아의 세 번의 연애 경력—전부 온라인에서 시작되어 키스까지만 도달한—을 테오도르는 알고 있었다. 유시아의 연애 감각이 특수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FPS 게임의 프로씬에서 4년을 보낸 유시아에게 관계란 모니터 너머의 텍스트와 보이스였고, 물리적 접촉의 문법은 거의 학습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유시아가 테오도르를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호칭의 배정이었지, 신체적 친밀감의 약속이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엄지가 무릎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드레스룸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시아의 턱을 들어올리고 '더 이상 가만두지 못한다'고 경고했을 때,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에 비친 것은 욕망이 아니라 순수한 혼란이었다. '뭘 할 건데?' 유시아의 그 질문은 도발이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 테오도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왜 거리를 좁히는 것인지. 왜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인지. 유시아에게 그 모든 신호는 해독되지 않는 언어였다.

 그날 이후 테오도르는 속도를 조절했다. 유시아의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그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시아의 속도'가 이 정도일 줄은—예측하지 못했다. 유시아의 속도는 정지에 가까웠다. 정지가 아니라 방향 자체가 없었다. 유시아는 테오도르를 좋아했다. 그것은 행동으로 증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시아의 '좋아함'은 물리적 접촉의 축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유시아에게 좋아함은 함께 밥을 먹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장을 보는 것이었다. 손을 잡는 것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다.

"...Bloody hell."
(...젠장.)

 소파 위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량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유시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진 말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다시 유시아에게로 내려왔다. 노트북 화면의 빛을 받는 유시아의 옆얼굴.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들려 소파 쿠션 위에 놓였다. 쿠션 하나 너머에 유시아의 왼손이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거리. 뻗으면 닿는다. 뻗지 않으면 닿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뻗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일어서는 동작이 느렸다. 무릎 위에 놓였던 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듀퐁 라이터의 금속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테오도르의 엄지가 라이터의 뚜껑을 한 번 열었다가 닫았다. 딸깍. 거실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울렸다.

"I should head back. Early briefing tomorrow."
(나 슬슬 가봐야겠다. 내일 아침 브리핑 있어.)

 유시아를 향해 던진 말이었으나 시선은 현관 쪽을 향해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일 오전 7시에 형사 1과 정기 브리핑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가야 하는 이유가 브리핑 때문만은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더 오래 앉아 있으면—쿠션 너머로 손을 뻗을 것 같았다. 유시아가 원하지 않는 속도로, 유시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유시아의 손을 잡을 것 같았다. 드레스룸에서의 실수를 반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섰다.

 현관 앞에서 군화 끈을 매는 동안 테오도르의 등이 유시아를 향해 있었다. 넓은 어깨가 현관의 간접 조명 아래에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끈을 매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더뎠다. 매듭을 한 번 풀고 다시 묶었다.

"Lock the door properly. And throw out the cans in the hallway before you sleep."
(문 제대로 잠가. 그리고 복도에 놔둔 캔 봉투 자기 전에 버려.)

 어깨 너머로 던진 말. 잔소리의 형태를 빌린 인사. 테오도르가 현관문을 열었다. 2월의 밤공기가 틈새로 밀려들었다. 스웨터의 소매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딛기 직전, 테오도르의 발이 문턱 위에서 멈추었다. 0.7초. 고개가 어깨 너머로 반쯤 돌아갔다. 루비색 눈동자가 거실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유시아의 실루엣을 한 번 담았다.

"...Good night, sweetie."
(...잘 자, 예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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