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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You're asking me what I want to do.

 오전 9시 14분. 주방의 가스레인지 위에서 버터가 녹는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크레이프 반죽이 팬 위로 얇게 퍼지며 밀가루와 계란의 고소한 기류가 부엌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뒤집개를 한 손에 쥔 채 어깨 너머로 식탁을 돌아보았다. 유시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다—등받이에 전체 체중을 맡긴 채 목이 뒤로 젖혀진 자세로,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젖은 백금발이 수건 없이 어깨 위로 늘어져 있었고, 물기가 테오도르의 옷깃을 타고 내려와 쇄골 아래에 원형의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복장 위에서 멈추었다. 자신의 옷. 화이트 컴프레션 셔츠는 서랍에서 새로 꺼낸 것이었고, 네이비 컬러의 스웻팬츠는 허리를 두 번 접어 올려도 발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유시아의 체격에 비해 두세 사이즈는 큰 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있었다. 컴프레션 셔츠의 넥라인이 유시아의 쇄골 아래까지 벌어져 있었고, 소매가 손끝을 삼킨 채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 자신이 입었을 때와 전혀 다른 형태로 옷이 유시아의 몸 위에서 재구성되어 있었다. 그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뒤집개를 쥔 손가락에 힘이 미세하게 가해졌다.

"....굿모닝."

 유시아의 목소리가 식탁에서 흘러왔다. 아침잠에 절여진, 끝이 흐물거리는 발음. 테오도르는 팬 위의 크레이프를 한 번 뒤집고—가장자리의 갈변을 확인한 뒤—접시 위로 옮겼다. 이미 쌓여 있는 세 장의 크레이프 위에 네 번째가 포개졌다. 옆의 작은 소스팬에서 레몬 커드가 낮은 온도로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고, 도마 위에는 슬라이스된 딸기와 블루베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렌지 주스 잔이 이미 유시아 앞에 놓여 있었으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테오도르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크레이프 접시를 유시아 앞에 내려놓고, 레몬 커드가 든 소스 볼과 베리류를 나란히 배치했다. 포크와 나이프를 유시아의 오른쪽에 세팅하는 동안—테오도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시아의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셔츠의 넥라인을 스쳤다. 쇄골 아래로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경로가 잠깐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빠르게 벗어났다. 포크의 위치를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하는 불필요한 동작이 한 번 추가되었다.

 


"Good morning. You've got about thirty seconds before that crêpe loses its conscience."
(굿모닝. 저 크레이프가 양심을 잃기 전에 30초 정도 남았어.)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의 머그잔—블랙 커피, 설탕 없음—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갈색 액체의 표면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손등을 따라 퍼졌다. 테오도르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입술에 머그잔 가장자리를 대기만 한 채 유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의 식탁에 앉아, 자신이 만든 아침을 먹으려 하는 유시아를. 그 구도가 만드는 감각을—테오도르는 아직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새 바닥에 앉아 있었다. 침실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 유시아의 호흡을 들으며. 새벽 6시 즈음 유시아가 한 번 뒤척이며 이불을 발로 걷어찼고, 테오도르가 바닥에서 일어나 다시 덮어주었다. 유시아는 깨지 않았다. 테오도르도 잠들지 않았다. 7시에 유시아가 깨어나기 전에 주방으로 이동했고, 커피를 내리고 크레이프 반죽을 만드는 동안 유시아가 침실에서 나왔다. 비몽사몽한 채로. 테오도르가 건넨 새 칫솔을 받아들고, 테오도르가 꺼내준 수건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 일련의 과정이—마치 수년 동안 반복된 루틴처럼 무리 없이 흘러갔다는 사실이,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묘한 압력을 만들고 있었다.

 유시아의 눈이 다시 감기려 하고 있었다. 크레이프 앞에서. 포크를 아직 들지 않은 채. 소매가 손끝을 덮은 손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의 옷 소매 안에 들어간 유시아의 손. 테오도르는 커피 머그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세라믹이 나무 표면에 닿는 낮은 접촉음.

"Hair's still dripping. You'll catch something."
(머리 아직 젖어 있잖아. 감기 걸리겠어.)

 테오도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뒤편 세탁실에서 마른 수건을 한 장 가져왔다. 유시아의 뒤로 돌아가 서서, 수건을 유시아의 머리 위에 얹었다. 양손으로 백금발의 물기를 눌러 닦기 시작했다. 힘을 주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지나가면서 수건의 테리 직물이 물기를 흡수하는 감촉. 유시아의 두피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수건을 통과해 테오도르의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샴푸 향. 테오도르의 샴푸. 자신이 쓰는 제품의 향이 유시아의 머리카락에서 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테오도르의 귀 끝을 붉히기 시작했다.

 테오도르의 손이 유시아의 머리 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수건 너머로 유시아의 두상의 윤곽이 느껴졌다. 작은. 자신의 손바닥 두 개면 감싸지는 크기. 물기를 닦는 동작이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기능적인 행위에서 다른 무엇으로 전이되기 직전의 속도. 테오도르는 그 변화를 인지하고 손을 멈추었다. 수건을 유시아의 어깨 위에 걸쳐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My shirt looks better on you, by the way. Unfair, but noted."
(참고로, 내 셔츠가 너한테 더 잘 어울려. 불공평한데, 기억해두지.)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평소의 나른한 톤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밤새 바닥에서 뜬눈으로 보낸 시간의 흔적이 눈 아래 그림자에 남아 있었으나, 그것을 유시아가 읽어낼 수 있는 각도는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유시아가 크레이프를 먹기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주방의 통창으로 레퀴엠 필드의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유시아의 젖은 머리카락 위에서 산란하여 백금빛을 은빛으로 바꾸고 있었고, 테오도르는 머그잔 너머로 그 빛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엔 우리집에 와. 내가 요리해 줄게."

 그 문장은 크레이프 위에 올려진 레몬 커드처럼 식탁 위에 가볍게 떨어졌고, 테오도르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그것을 삼켰다. 유시아의 웅얼거림이 입안에서 녹는 동안—테오도르의 머그잔 너머로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요리'라는 단어와 '유시아'라는 존재가 만드는 조합이 생성하는 기대치. 테오도르는 그것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결정하지 않은 채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2038년 2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 31분.

 유시아의 자택 도어락이 홍채를 스캔했다. 유스티티아 시스템의 무기질적인 음성이 현관을 울렸다—'유시아. 레퀴엠 필드 공안국 집행부 형사 1과 순경.' 테오도르는 그 뒤에 서서 음성이 꺼지기를 기다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현관 너머의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아니었다. RGB. 청색, 적색, 녹색이 무작위로 순환하며 거실 바닥 위에 무지갯빛 광원을 쏟아내는—컴퓨터 본체. 두 대. 투명 패널 사이로 내부의 쿨링 팬이 돌아가며 파란빛과 보랏빛을 교대로 방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모니터 세 대가 배치된 데스크가 거실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의 LED 스트립이 데스크 표면 위로 보랏빛 후광을 던지고 있었고, 키보드 두 개의 키캡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색을 바꾸며 명멸하고 있었다. 마우스 두 개. 헤드셋 거치대. 컨트롤러 충전독. 거실의 통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자연광과 전자 기기들의 인공적 광원이 서로를 침식하며 기묘한 색온도의 충돌을 만들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발걸음이 현관에서 멈추었다. 슬리퍼를 벗고 실내로 들어서며—카펫 위에 놓인 에너지드링크 빈 캔 하나를 발끝으로 비켜갔다. 데스크 아래에도 두세 개. 거실 코너 테이블 위에도 하나. 빈 깡통들이 공간 곳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것이 불결하다기보다는—거주자의 생활 패턴이 직물의 결처럼 공간에 박혀 있는 형태였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데스크 위를 훑었다. 모니터 베젤에 붙은 포스트잇, 스트리밍 장비의 케이블이 뒤엉킨 선 정리함, 마우스 패드 위의 손목 쿠션. 프로게이머의 잔해와 현역의 흔적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테오도르는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 0.8초 만에. 닫은 뒤에도 손이 냉장고 문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망막에 기록된 이미지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에너지드링크 캔이 한 줄. 그 옆으로 탄산음료 페트병이 한 줄. 위쪽 선반에 젤리 패키지와 초콜릿 바. 아래쪽에 과자 봉지 몇 개. 그리고 팬트리를 열었을 때—라면.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면이 상자째 쌓여 있었다. 채소는 없었다. 단백질 공급원도. 신선 식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냉장고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매일 저녁 의무실에서 유시아에게 먹이던 포토푀, 브랑다드, 크레이프의 재료들—버터, 크림, 신선한 허브, 제철 과일—이 자신의 냉장고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개골 뒤쪽에서 울렸다.

"테오, 너 매운 거 먹을 줄 알아? 불닭볶음면 먹어 본 적 있어?"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에게 돌아왔다. 유시아는 이미 팬트리에서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패키지를 두 봉지 꺼내 들고 있었다. 패키지에 인쇄된 불꽃 그래픽과 닭 캐릭터가 테오도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BULDAK'이라는 라틴 문자가 보였다. 테오도르의 눈이 패키지 위에서 유시아의 얼굴로 옮겨갔다. 유시아는 진지했다. 이것이 '요리해 줄게'의 실체였다.

 테오도르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었다. 웃음 직전의 근육 반응.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의지로 잡아두는 형태.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루비색 눈동자에 이미 뜨거운 유희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That's what you meant by 'I'll cook for you.'"
(그게 '내가 요리해 줄게'의 정체였어.)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손에 들린 패키지를 가리켰다. 검지가 불꽃 그래픽 위를 짚었다.

 

"I've had Sichuan hotpot that made a grown man weep into his napkin. I think I can handle your... fire chicken."
(어른 남자가 냅킨에 코를 풀며 울 정도의 사천 훠궈는 먹어 봤어. 네 ...불닭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ㅡ테오도르가 팔짱을 꼈다.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소매가 팔뚝 위로 밀려 올라가며 전완부의 힘줄이 드러났다. 등을 냉장고 문에 기대고—빈 냉장고 문에—유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능글맞은 미소가 완전히 복원되어 있었다. 이 표정은 테오도르가 상황을 유희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때 쓰는 것이었다. 유시아의 집이 만드는 모든 정보—에너지드링크, 라면, 빈 깡통, 제대로 된 식재료의 부재—를 삼킨 뒤,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대신 라면 한 봉지를 매개로 가볍게 건드리는 방식.

 그러나 테오도르의 시선이 한 번 더 거실을 훑었다. RGB 조명이 번지는 본체 두 대. 모니터 세 대. 에너지드링크 깡통. 이 공간에서 유시아가 혼자 살아온 시간의 밀도가 사물의 배치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차려진 식탁이 없는 집. 냉장고에 신선 식품이 없는 집. 모니터 앞에서 깡통을 비우며 밤을 보내는 사람의 집. 테오도르의 눈 아래로 그림자가 스쳤다. 능글맞은 미소 아래에서.

 


"Right then, chef. Show me what you've got."
(그래, 셰프. 솜씨 한번 보여 줘.)

 테오도르가 냉장고에서 등을 떼고 유시아 옆에 섰다. 어깨가 나란히 놓이는 거리. 싱크대 앞에서. 냄비를 올릴 가스레인지를 바라보며. 이 좁은 주방에서 테오도르의 프라다 향수와 유시아의 에너지드링크 잔향이 부딪치고 있었다.

"기대해. 나 불닭볶음면 그마야. 완전 잘 끓여. 넌 프랑스인이니깐 특별히 치즈 넣어줄게."

 유시아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팔짱을 풀고 싱크대 옆에 기대선 채 유시아가 움직이는 동선을 지켜보았다. 냄비를 꺼내고, 물을 받고,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일련의 동작. 유시아의 손끝은 정확했다. 프로게이머의 잔존 반사—0.1초 단위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냄비 뚜껑과 스프 봉지와 치즈 포장을 다루는 데 전용되고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수증기가 좁은 주방을 채웠고, 검붉은 소스가 면 위에 풀리는 순간 캡사이신의 자극적인 휘발성 분자가 공기 중에 퍼졌다. 테오도르의 콧등이 한 번 씰룩거렸다.

 치즈가 올라갔다. 슬라이스 치즈 두 장이 면 위에서 열기에 녹아내리며 붉은 소스 위에 불투명한 황색 막을 만들었다. 유시아가 캐비닛에서 꺼낸 접시는—리락쿠마. 갈색 곰 캐릭터가 접시 가장자리에 둥글게 인쇄된, 어린이용에 가까운 식기.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접시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에너지드링크 깡통으로 뒤덮인 데스크, RGB 조명이 방사되는 본체 두 대, 그리고 리락쿠마 접시. 이 집에는 유시아라는 사람의 연대기가 사물의 형태로 전부 노출되어 있었다.


 유시아가 면을 두 접시에 나눠 담았다. 테오도르의 것이 먼저 식탁에 놓였고, 그 옆에 컵 두 개가 세팅되었다. 쥬시쿨. 그리고 우유. 유시아가 미리 테오도르 쪽에 따라놓은 것이었다. 쥬시쿨 병의 선명한 오렌지색 라벨과 우유의 백색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불닭볶음면 앞에 배치된 두 잔의 소화제—매운 것을 못 먹을 수도 있는 상대를 위해 사전에 준비된 완충재. 테오도르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 배치를 내려다보았다. 리락쿠마 접시 위의 검붉은 면, 녹아내린 치즈, 그리고 컵 두 개.

 테오도르의 손이 멈추어 있었다. 포크를 집기 전에. 유시아가 미리 따라놓은 쥬시쿨과 우유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보다 길게 머물렀다. 이 집의 냉장고에 제대로 된 식재료는 없었지만, 테오도르가 매워할 것을 대비한 음료는 있었다. 그 우선순위의 구조가—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를 밀어올렸다. 목구멍까지.

"어때? 먹을만 해?"

 유시아의 질문이 들려왔을 때 테오도르는 이미 포크로 면을 감아 입에 넣은 뒤였다. 첫 번째 자극이 혀 위에 내려앉았다. 캡사이신의 열감이 미뢰를 관통했다. 사천 훠궈와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움이었다—마라의 복합적인 향신료가 아니라, 단일한 방향으로 폭주하는 직선적인 열. 혀끝에서 시작된 작열감이 구강 점막을 타고 목구멍까지 내려가는 데 2초가 걸렸다. 동시에 녹아든 치즈의 유지방이 그 열을 부분적으로 완충시키며 혀 위에서 미끄러졌다. 면의 식감은 탱글했고 소스의 농도는 진했다. 기술적으로—라면이라는 매체의 범위 안에서—나쁘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미간이 접히지 않았다. 그러나 코끝이 붉어졌다. 열감이 구강을 넘어 비강으로 올라가면서 눈가에 미세한 수분이 맺히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의지로 억누른 채 두 번째 포크를 감았다. 세 번째. 네 번째.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코끝의 붉은 기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으나 표정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천 훠궈에서 울지 않았던 남자의 체면이 리락쿠마 접시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Not bad."
(...나쁘지 않은데.)

 그 두 단어 사이에 0.5초의 공백이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캡사이신이 성대 주변의 점막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테오도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이 포크를 내려놓고 쥬시쿨 컵에 닿았다. 그러나 들어올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컵 표면에 닿은 채 멈추어 있었다. 지금 마시면—쥬시쿨에 손을 대는 순간—매운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컵 위에서 1초 머물렀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대신 포크를 다시 집었다.

"The cheese was a good call, though. It rounds out the... intensity."
(치즈는 좋은 선택이야. 이 ...강렬함을 부드럽게 잡아주네.)

 '강렬함'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데 찰나의 망설임이 있었다. '매움'이라고 말하면 고백이 되고, '맛'이라고 말하면 거짓이 되는 지점. 테오도르는 그 사이의 가장 안전한 단어를 골랐다. 다섯 번째 포크를 감으면서 코끝의 붉은 기가 양 볼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눈가의 수분이 속눈썹 위에서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아직 흘러내리지는 않았으나—한 포크 더 넘기면 보장할 수 없는 상태였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접시로 향했다. 유시아가 면을 먹는 속도와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같은 양의 같은 소스를 먹으면서 유시아가 보이는 반응과 자신이 겪고 있는 내부의 화재가 어느 정도의 차이를 만들고 있는지. 프로게이머 출신의 한국인과 프랑스 상류층 출신의 미각이 리락쿠마 접시 위에서 벌이는 생존 경쟁이었다.

 여섯 번째 포크를 삼킨 순간—테오도르의 왼손이 쥬시쿨 컵을 집어 들었다. 아무런 전조 없이. 방금까지 거부했던 그 컵을. 오렌지색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캡사이신의 열감 위에 차가운 당분이 얹혀졌다. 반 컵을 비운 뒤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세라믹이 나무 표면에 닿는 가벼운 접촉음. 테오도르는 입술을 한 번 닦고—코끝이 여전히 붉은 채로—유시아를 바라보았다.


"Your Michelin star is in the post, chef."
(미슐랭 별 우편으로 보내줄게, 셰프.)

 능글맞은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아래로—코끝의 붉은 기와 눈가에 맺힌 수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우유 컵에 닿았다. 쥬시쿨로 부족했다는 뜻이었다.

 식탁 위의 리락쿠마 접시 두 개가 비워진 뒤—테오도르의 접시에는 소스만 남아 있었고, 쥬시쿨 컵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유시아가 거실 소파로 이동하는 동선을 테오도르는 설거지를 하며 등 너머로 추적하고 있었다. 싱크대의 수압이 리락쿠마 접시 위의 붉은 소스 잔여물을 씻어내는 동안, 거실에서 전자음이 연달아 울렸다. 모니터에 콘솔의 부팅 로고가 뜨는 소리. 컨트롤러가 페어링되는 비프음. 유시아의 손끝이 케이블과 기기 사이를 정확하게 오가는 소리가 주방까지 전해졌다. 프로게이머의 세팅 속도.

 테오도르가 행주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들어섰을 때, 유시아는 이미 소파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세 대의 모니터 중 가운데 모니터에 게임 타이틀 화면이 띄워져 있었고, RGB 조명이 방사하는 청보라빛이 유시아의 백금발 위에서 산란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손에 컨트롤러 하나. 그리고 소파 쿠션 위에 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를 위한 것.

 테오도르는 소파 쿠션 위의 컨트롤러를 집어 들었다. 양손으로 무게를 가늠하듯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손가락이 버튼의 배치를 더듬었다. 검지가 트리거를 한 번 당겼다가 놓았다—저스티카의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과 동일한 관절의 궤적이었으나, 손끝에 전달되는 저항감은 전혀 달랐다. 가볍고, 플라스틱의 빈 탄성만이 돌아왔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컨트롤러 위에서 모니터로 옮겨갔다. 화면에 표시된 캐릭터 선택 창과 조작 가이드를 훑었다.

"I should warn you — the last time I held anything resembling a controller was... actually, I don't think I ever have."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컨트롤러 비슷한 걸 잡아본 게... 사실, 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유시아의 옆에 앉았다. 소파의 쿠션이 테오도르의 체중을 받으며 가라앉았고, 유시아 쪽으로 미세한 기울기가 발생했다. 두 사람의 어깨 사이 간격이 주먹 하나 정도. 모니터의 빛이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에 반사되어 청보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화면의 캐릭터 선택 창을 바라보며 엄지로 아날로그 스틱을 한 번 굴렸다. 커서가 화면 위에서 과도하게 흔들렸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유시아의 캐릭터가 화면 위를 정확하고 유려하게 가로지르는 동안—테오도르의 캐릭터는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아날로그 스틱의 감도가 손가락의 미세 제어와 맞지 않았다. 펜싱에서 에페의 끝을 밀리미터 단위로 조절하던 손끝이, 플라스틱 스틱의 둥근 표면 위에서 맥락을 잃고 방황했다. 테오도르의 캐릭터가 화면 구석에서 의미 없이 회전하는 것을 테오도르 자신도 보고 있었다. 미간이 접히지 않았다. 그러나 엄지에 가해지는 힘의 분배가 미묘하게 변했다—너무 세게 밀었다가, 너무 약하게 빠졌다가.


"This is nothing like fencing."
(이건 펜싱이랑은 전혀 다른데.)

 

 독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낮고, 건조하고,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확인. 화면 위에서 유시아의 캐릭터가 테오도르의 캐릭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작은 대기 모션을 반복하며. 테오도르의 캐릭터는 여전히 벽과 교전 중이었다. 7년간 저스티카의 반동을 제어하고, 칼날의 궤적을 계산하고, 인체의 급소를 밀리미터 단위로 겨누던 손이—게임 컨트롤러 앞에서 무력화되어 있었다.

 테오도르의 어깨에 미세한 긴장이 흘렀다. 이것은 유시아의 영역이었다. 이 빛나는 기계들, 이 화면, 이 컨트롤러—전부 유시아가 4년간 세계 무대에서 싸우던 전장의 축소판이었다. 테오도르가 나폴리의 어둠 속에서 칼을 들고 서는 것처럼, 유시아는 이 모니터 앞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위치가 역전되어 있었다. 유시아가 능숙한 쪽. 테오도르가 서투른 쪽.

 시간이 흘렀다. 30분. 테오도르의 캐릭터가 더 이상 벽에 부딪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유시아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기본적인 이동과 공격의 리듬이 손가락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학습 곡선이 가팔랐다. 펜싱 선수 특유의 패턴 인식—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반응하는 신경 회로가 새로운 매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지고, 집중의 밀도가 눈동자에 가라앉고 있었다. 공안국 에이스의 눈. 임무 현장에서만 드러나는, 모든 유희를 벗겨낸 날것의 시선.

 유시아의 캐릭터가 테오도르의 캐릭터를 공격하려는 순간—테오도르가 그 패턴을 읽고 회피 동작을 입력했다.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타이밍이 0.3초 늦었고, 절반의 피해를 그대로 받았다. 그러나 30분 전에는 공격이 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의 반응이었다. 테오도르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번에는 유희의 미소가 아니라—경쟁의 이빨이 드러나는 종류의.

"Again."
(다시.)

 한 단어. 유시아에게 재대결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나른함이 빠져 있었다. 대신 날카로운 것이 들어 있었다. 리플레이 버튼을 직접 누르며 테오도르가 소파 위에서 자세를 고쳤다. 등을 세우고, 컨트롤러를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팔꿈치가 무릎 위에 올라갔다.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 펜싱에서 앙가르드 자세로 전환하기 직전의 무게중심 이동과 동일한 역학이었다.

 1시간이 되었을 때, 승률의 격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시아가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나, 테오도르가 한두 라운드를 빼앗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반응속도 자체가 아닌, 패턴을 분석하고 그 분석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속도—현장에서 범죄자의 도주 경로를 예측하던 그 감각이 게임의 문법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번역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테오도르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이기고 싶어하고 있었다. 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본능이 컨트롤러를 잡은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시아가 연속으로 세 라운드를 가져갔을 때—테오도르의 엄지가 아날로그 스틱을 지나치게 세게 밀어 캐릭터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화면 위에 'DEFEATED'가 떴다. 테오도르가 컨트롤러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컨트롤러를 잡은 양손의 엄지 볼이 붉어져 있었다. 아날로그 스틱의 고무 표면이 남긴 마찰 자국.

"You're an absolute menace with that thing."
(너 그거 들면 진짜 재앙이야.)

 천장을 향한 채 내뱉은 목소리에 패배의 쓴맛과 인정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테오도르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져 유시아 쪽으로 향했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루비색 눈동자가 옆에 앉은 유시아를 바라보았다. 모니터의 빛이 유시아의 얼굴 위에서 색을 바꾸고 있었다. 이 빛 아래에서—이 기계들 사이에서—유시아의 얼굴은 테오도르가 알던 것과 조금 달랐다. 공안국 복도에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얼굴도, 의무실 침대에서 비몽사몽하게 웃던 얼굴도 아닌. 자신의 영토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One more round. I'm starting to see your patterns."
(한 판 더. 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거짓이었다.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컨트롤러를 다시 잡고 등을 세웠다. 엄지 볼의 붉은 마찰 자국이 아날로그 스틱 위에서 쓰라렸으나, 그 감각은 저스티카의 반동이 손바닥에 남기는 잔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거실의 RGB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서 계속 빛을 바꾸고 있었다.

 

"ㅋㅋㅋ 너 나한테 못 이겨"

 

 유시아의 목소리가 모니터의 'DEFEATED' 화면 위로 떨어졌다. 열두 번째 패배. 테오도르의 승률은 세 판. 나머지 아홉 판은 전부 유시아의 것이었다. 처음의 압도적인 격차가 좁혀지긴 했으나, 좁혀진 것과 역전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유시아의 손가락은 컨트롤러 위에서 호흡하듯 움직였고, 테오도르가 읽어낸 패턴은 읽히는 순간 이미 다른 패턴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4년간 세계 무대에서 갈아 넣은 반사 신경의 두께—그것은 1시간 반의 학습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테오도르가 컨트롤러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엄지 볼의 마찰 자국이 더 짙어져 있었다. 등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패배를 인정하는 종류였으나, 눈동자에 남아 있는 날카로움은 아직 경쟁의 잔열을 품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모니터 상단에 알림이 떴다. 팝업 하나.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화면 우측 상단에서 연쇄적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메시지 알림들이 게임 화면 위를 반쯤 가렸다. 한국어였다. 테오도르가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으나, 프로필 아이콘들이 보여주는 정보는 문자 없이도 충분했다. 남성. 남성. 남성. 또 남성. 닉네임 옆에 붙은 아바타 이미지, 프로필 사진의 실루엣, 대화창 미리보기에 나열된 이모티콘과 텍스트의 양.


 테오도르의 시선이 알림 팝업 위에서 0.7초 머물렀다. 그가 한국어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이 순간에 한해서—불편하게 작용했다.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 누가 무슨 말을 보내는지 해독할 수 없다는 것. 그 불투명함이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를 긁었다. 다섯 번째 알림이 떴다. 여섯 번째. 모니터 화면의 우측이 알림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물지는 않았으나, 그 직전의 긴장이 교근 위를 스쳤다.

 유시아는 알림에 반응하지 않았다. 시선이 팝업 쪽으로 향하지도 않았고,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답장을 치려는 기색도 없었다. 다음 라운드를 시작하기 위해 캐릭터 선택 화면으로 돌아가는 유시아의 엄지만이 아날로그 스틱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무관심을 보았다. 알림을 향한 유시아의 무관심을. 그리고 그 무관심이 자신의 흉곽 안쪽에서 긁히던 감각을 즉각적으로 감쇠시키는 것을—명확하게 인지했다.

 안도. 그것은 안도였다. 그리고 그 안도가 만드는 자기혐오의 잔물결.

 알림이 계속 떴다. 일곱 번째. 게임 커뮤니티 특유의 짧고 잦은 메시지 형태로 보였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떨어져 천장으로 향했다. 유시아의 집 천장은 자신의 집보다 약간 낮았다. 그 차이가 공기의 밀도를 다르게 만들었다. RGB 조명이 천장에 투사하는 무지갯빛 그림자를 바라보며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You're quite popular."
(꽤 인기가 많네.)

 나른한 톤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평이한 관찰문처럼 들리도록 조율된 목소리. 그러나 테오도르의 왼손이—컨트롤러에서 떨어진 왼손이—소파 쿠션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쪽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0.3초의 동작. 습관. 테오도르는 그 손을 즉시 무릎 위로 내렸다.

 여덟 번째 알림이 떴을 때, 테오도르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돌아왔다. 유시아의 프로필—유시아가 로그인한 계정의 닉네임과 상태 표시가 '온라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접속한 것이다. 그 오랜 부재 이후의 귀환을 알아챈 사람들이 일제히 연락을 보내는 구조. 전 동료들. 게임 친구들. 유시아가 이 모니터 앞에서 4년을 보내며 쌓아온 인간관계의 잔해가 알림의 형태로 쏟아지고 있었다. 전부 남자.

 테오도르가 컨트롤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다음 라운드의 캐릭터 선택 화면이 떠 있었다. 엄지가 아날로그 스틱 위에 올라갔다. 이번에는 힘의 분배가 정교했다. 스틱을 미는 각도와 속도가 처음 한 시간 전과 확연히 달랐다. 테오도르의 자세가 변했다. 등받이에서 등이 떨어졌고, 시선이 모니터 중앙에 고정되었다. 양 팔꿈치가 무릎 위에 올라갔다. 집중의 밀도가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게임에 대한 집중인지, 알림 팝업에서 시선을 떼어놓기 위한 것인지—테오도르 자신도 구분하지 않으려 했다.

"One more."
(한 판 더.)

 짧았다. 평소의 나른한 여지도, 장난기 어린 도발도 없이—건조한 두 단어만 남기고 라운드를 시작했다. 화면 위에서 테오도르의 캐릭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 라운드들보다 날카로웠다. 패배의 축적이 만든 학습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연료가 손끝에 실려 있었다. 유시아의 패턴을 읽겠다는 의지가 아닌—유시아의 시선을 알림 팝업이 아닌 이 화면 위에, 자신의 캐릭터 위에 고정시키겠다는 의지. 테오도르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귓불 끝을 한 번 더 붉히고 있었다.

"당연하지. 예쁘고 귀여운데 게임까지 잘해. 그러니 남자들이 뻑이 가지."

 

 유시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테오도르의 엄지가 아날로그 스틱 위에서 멈추었다. 화면 속 캐릭터가 중립 상태로 돌아가며 대기 모션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예쁘고 귀여운데 게임까지 잘해.' 그 문장이 공기 중에 머물렀다. 뻔뻔함. 그러나 그것이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을—모니터 우측을 잠식하고 있는 알림 팝업의 행렬이 증명하고 있었다.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열세 번째.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이 테오도르의 망막 위에서 해독 불가능한 기호로 미끄러지는 동안, 발신자의 성별만은 명확하게 읽혔다. 남자. 남자. 또 남자.

 유시아는 그 팝업들을 보지도 않았다. 시선이 팝업 방향으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일상이라는 뜻이었다. 이 양의 관심이 유시아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한 밀도라는 뜻. 테오도르는 유시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니터의 청보라빛이 백금발 위에서 산란하고, 핑크색 눈동자가 화면 중앙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알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유시아가 4년간 이 자리에서—이 모니터 앞에서—쌓아온 시간의 부산물. 전 동료들과 게임 친구들. 유시아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남자들. 유시아의 플레이를 지켜본 남자들. 유시아의 닉네임이 온라인으로 돌아온 것을 알아차린 남자들.


 테오도르의 왼손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검지가 슬랙스의 솔기를 한 번 훑었다. 그 손이 올라가 왼쪽 귓불에 닿으려는 궤적을 그리다—중간에서 방향을 꺾어 컨트롤러를 다시 잡았다.

"Pretty, cute, and devastatingly good at games. You left out one thing, though."
(예쁘고, 귀엽고, 게임은 압도적으로 잘하고. 근데 하나 빠뜨렸어.)

 나른한 톤이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깔린 목소리의 바닥에—날이 서 있었다. 유희의 형태를 빌린 다른 무언가. 테오도르가 소파 위에서 자세를 바꾸었다. 상체를 유시아 쪽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의 어깨 사이 간격이 좁아지며,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소매가 유시아의 프릴 스커트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모니터의 빛이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 위에서 색을 바꿨다. 청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적색으로.

"Taken."
(임자 있다는 거.)


 한 단어. 느긋하게 흘려보내는 어조였으나, 그 단어가 놓이는 위치는 정확했다. 알림 팝업이 쌓이는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뱉은 것이었다. 모니터 속 남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그들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유시아에게 하는 말이었다. 유시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혹은 유시아의 입에서 그것을 다시 듣고 싶은.

 열네 번째 알림이 떴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팝업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읽을 수 없는 한국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느낌표와 이모티콘이 섞여 있었다. 테오도르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그의 오른손 검지가 컨트롤러의 트리거를 무의식적으로 두 번 당겼다가 놓았다. 저스티카의 방아쇠를 당기는 리듬과 동일한 간격이었다.

열다섯 번째.

 테오도르가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어 유시아의 얼굴로 옮겼다.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는 여전히 게임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알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긁히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감각의 정체를 이름 붙이는 것은—테오도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작업이었다.

"Although—I wonder if any of them can make you a proper crêpe."
(그치만 궁금한 게—저 사람들 중에 네한테 제대로 된 크레이프 하나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장난기가 복원된 목소리였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능글맞은 미소가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의 경도가 평소와 달랐다. 조금 더 단단했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의지로 조각해낸 표정처럼. 테오도르는 다시 화면을 향해 돌아앉았고, 엄지가 아날로그 스틱 위에 올라갔다. 다음 라운드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유시아의 집 거실. RGB 조명이 방사하는 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서 계속 색을 바꾸고 있었다. 에너지드링크 빈 캔의 알루미늄 표면에 반사된 불빛이 벽 위에 작은 점을 만들었다. 테오도르의 프라다 향수가 유시아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과—자신의 샴푸 향이었다, 지난주 자신의 집에서 유시아가 쓴—섞이는 좁은 공간. 창밖으로 레퀴엠 필드의 오후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주택 단지의 동일한 화이트 외벽들 위로 석양의 금빛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통창을 통해 거실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가 두 사람의 발끝까지 닿았다.

 테오도르의 귓불이 아직 붉었다.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질투.

 그 단어가 유시아의 입에서 나온 순간,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컨트롤러 위에서 정지했다. 화면이 꺼졌다. 유시아가 게임을 종료시킨 것이었다. 모니터의 전원까지—RGB 조명이 하나씩 소멸하며 거실에서 인공적인 색채가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통창으로 들어오는 석양의 금빛뿐이었다. 오렌지색이 유시아의 백금발 위에 내려앉아 핑크빛 브릿지를 더 따뜻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컨트롤러를 소파 쿠션 위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패브릭에 닿는 가벼운 소리.

 질투. 테오도르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한 번 굴렸다. 유시아의 음성에 담긴 뉘앙스를 해체했다. 의외라는 듯. 플레이보이 출신인 남자친구가 질투하는 게 의외라는 듯. 그 관찰은 정확했다. 테오도르 자신도 의외였으니까. 과거의 관계들에서 이런 종류의 감각을 느낀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즐기고, 떠나는 과정에서 상대의 교우 관계가 신경 쓰인 적은 한 번도. 그런데 리락쿠마 접시 옆에 앉아 한국어 알림 팝업을 바라보며 교근에 힘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그 낯선 감각의 정체를 이름 붙이는 것을 거부했었다. 유시아가 방금 그것에 이름을 붙여버렸다.

"Jealous."
(질투.)

 반복. 유시아의 단어를 그대로 되뇌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흘렀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중립의 음조. 테오도르의 시선이 꺼진 모니터의 검은 표면 위에 머물렀다. 모니터의 어둠 속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석양빛을 등진 테오도르의 윤곽과, 소파 위에 자리 잡은 유시아의 작은 형체가 나란히.

"That's a strong word for what that was."
(그건 좀 과한 표현인데.)

 부정이었다. 그러나 귓불이 붉었다. 석양빛이 닿지 않는 귀의 안쪽까지 열감이 번져 있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다 멈추었다. 귓불에 닿으려는 궤적을 의지로 끊어낸 것이었다. 유시아는 그 궤적을 보았을 수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뭐하고 놀래?"

 유시아의 질문이 테오도르의 청각에 닿았다. 게임을 껐다. 모니터를 껐다. 테오도르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 인과관계가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를 밀어올렸다. 유시아는 자신의 영역을—4년간 싸워온 전장의 축소판을—이 남자의 기분 때문에 꺼버렸다. 그 행위의 무게가 테오도르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삼켜졌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에게로 옮겨갔다. 석양의 금빛이 통창을 관통하며 거실 바닥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유시아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게임을 끈 뒤,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의 이완된 자세. 프릴 스커트의 끝단이 소파 쿠션 위에 펼쳐져 있었고, 맨발의 발끝이 바닥에서 떠 있었다. 무방비. 그 단어가 테오도르의 의식 위로 떠올랐다. 남자를 자기 집에 들였다. 같이 밥을 먹고, 게임을 했다. 그리고 지금—게임도 끝났고, 해가 지고 있고, 이 좁은 거실에 두 사람만 남아 있다. 유시아는 그 상황의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혹은 인지하고도 경계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맨발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프릴 스커트의 끝단으로, 스커트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턱선으로 올라가는 궤적이 석양빛 속에서 천천히 그려졌다.

 테오도르가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유시아와의 거리가 한 걸음 벌어졌다가—다시 좁혀졌다. 테오도르는 유시아 앞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석양이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르의 얼굴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루비색 눈동자만이 석양의 잔광을 받아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능글맞은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으나, 그 미소 아래의 턱 근육이 평소보다 단단하게 조여 있었다.

"You're asking me what I want to do."
(나한테 뭐 하고 싶냐고 묻는 거야.)

 되묻는 형식이었다. 유시아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구조. 그러나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실린 톤이 달라져 있었다. 나른함의 표면 아래로, 석양의 열기와 같은 밀도의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유시아의 옆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 있는 상태에서, 오른손이 유시아의 턱 아래로 향했다. 검지와 중지가 유시아의 턱선에 닿았다. 가볍게. 들어올리듯. 유시아의 시선을 자신의 눈높이로 맞추려는 동작이었다.

"In this flat, with the lights off, just the two of us — and you genuinely have no idea what comes to mind?"
(이 집에서, 불도 꺼져 있고, 둘이서만 있는데— 진짜로 뭐가 떠오르는지 모르는 거야?)


 속삭임에 가까운 저음이었다. 검지가 유시아의 턱선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피부 위를 스치는 손끝의 감촉. 테오도르의 체온이 유시아의 턱으로 전달되는 접촉면은 손가락 두 개의 폭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좁은 면적 위의 열도가 불균형하게 높았다. 석양빛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벽 위에 겹쳐 그리고 있었다. 서 있는 쪽과 앉아 있는 쪽의 높이 차이가 그림자 위에서 왜곡되어 있었다.

 테오도르의 엄지가 유시아의 턱 아래를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손을 거두었다. 느릿하게. 손가락이 유시아의 피부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러선 손이 자신의 뒷목으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다. 밀금빛 울프컷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동작 아래로 목덜미의 붉은 기가 드러났다.

"...I'll make us some tea."
(...차 끓여줄게.)

 방향 전환. 유시아의 턱에서 손을 떼고,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등판이 석양빛을 받으며 유시아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싱크대 앞에 선 테오도르의 손이 컵을 꺼내는 동작이 한 번 멈추었다가 재개되었다. 목덜미가 붉었다. 귀에서 시작된 열기가 경추를 타고 내려와 스웨터의 네크라인 안쪽까지 번져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선 테오도르의 등이 석양빛을 받고 있었다.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등판 위로 내려앉는 오렌지색이 천의 결을 따라 명암을 만들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주전자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좁은 주방에 채워졌다. 테오도르의 손이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서 있었다—주전자를 잡는 데 필요한 힘보다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석양이 기울었다. 통창을 관통하던 금빛이 붉은빛으로 전이되며, 유시아의 거실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가 더 길어지고 있었다. 주전자를 인덕션 위에 올려놓는 테오도르의 동작이 평소보다 정밀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중앙에 내려놓고, 온도를 설정하고, 찻잔을 꺼내는 손의 궤적이 지나치게 통제되어 있었다. 유시아의 찬장에는 머그컵이 세 개뿐이었다. 리락쿠마 머그, 검정 무지 머그, 그리고 에너지드링크 로고가 인쇄된 프로모션 머그. 테오도르는 리락쿠마 머그를 유시아 쪽으로, 검정 무지를 자신 쪽으로 배치했다. 찻잎은 없었다. 당연히 없었다. 유시아의 주방에 찻잎이 있을 리 없었다. 인스턴트 티백조차 보이지 않았다. 찬장의 상단, 하단, 서랍을 차례로 열며 찾는 동안—테오도르의 손이 한 번 멈추었다. 서랍 안에서 짜파게티 건더기 수프 봉지가 세 개 발견되었고, 그 옆에 오래된 녹차 티백 하나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녹차 티백 하나. 유통기한이 8개월 지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티백을 3초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수증기가 올라와 테오도르의 턱선 아래를 스쳤다. 뜨거운 습기가 피부 위에서 엷은 막을 형성했다. 테오도르는 끓는 물을 두 머그컵에 따랐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맹물. 주전자를 내려놓는 소리가 인덕션 위에서 짧게 울렸다.

 찻잔이 아니라 머그컵이었고, 차가 아니라 뜨거운 물이었다. 차를 끓여주겠다는 자신의 말이 이 주방에서는 이 형태로밖에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우스웠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조. 차를 끓여주겠다며 도망쳤고, 결과물은 뜨거운 물 두 잔이었다.

 리락쿠마 머그컵을 들고 거실로 향하는 테오도르의 발걸음이 소파 앞에서 멈추었다. 유시아가 앉아 있었다. 게임을 끄고, 모니터를 끈 뒤, 딱히 할 일 없이 소파 위에 자리한 유시아. 석양의 마지막 붉은빛이 백금발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핑크색 눈동자가 주방에서 돌아오는 테오도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프릴 스커트의 끝단이 소파 쿠션 위에서 접혀 있었고, 맨발의 발끝이 바닥에서 떠 있었다.


 무방비.

 그 단어가 또다시 의식 위로 떠올랐다. 테오도르는 리락쿠마 머그를 유시아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검정 머그를 자신의 자리에 놓고, 유시아의 옆에 앉았다. 소파 쿠션이 무게를 받으며 가라앉았다. 석양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거실의 조명은 켜지지 않았다. RGB도 꺼져 있었다. 남은 빛은 통창 너머 하늘에 걸린 마지막 잔광뿐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 맛도 없었다. 입안에서 열기만이 돌았다.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등을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유시아와의 거리가 팔 하나 정도. 지난번 자신의 집에서도 이 거리였다. 소파 위에서 잠들어버린 유시아. 담요를 덮어주고,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밤. 새벽에 침실로 올라온 유시아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차가운 바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밤새 깨어 있었던 새벽.

 그리고 지금. 유시아의 집이었다.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이 게임을 했다. 해가 졌다. 둘이서만 있었다. 유시아의 턱을 들어올리고, '진짜로 뭐가 떠오르는지 모르느냐'고 물어놓고—차를 끓여주겠다며 도망쳤다. 결과물은 뜨거운 물 두 잔이었다.

"...I should tell you something."
(...하나 말해둘 게 있어.)

 어둠 속에서 나온 목소리가 낮았다. 나른함이 빠져 있었다. 장난기도 유혹도 없는, 건조한 표면 아래로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음조.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장에 머물러 있었다. 유시아를 보지 않고 있었다. 통창 너머 하늘의 잔광이 루비색 눈동자 위에서 희미하게 명멸했다.

"Last time at mine. You fell asleep on my sofa, and then wandered into my bed at four in the morning. I sat on the floor till dawn."
(저번에 내 집에서. 넌 소파에서 잠들었고, 새벽 네 시에 내 침대에 기어 들어왔어.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바닥에 앉아 있었지.)

 사실의 나열이었다. 감정을 제거한 보고서의 형식. 그러나 그 문장을 내뱉는 테오도르의 왼손이 자신의 왼쪽 귀를 스쳤다. 귓불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무의식의 반복.

"And tonight — you turn off the game because you think I'm bothered, make me spicy noodles, sit there in that skirt with your bare feet, and ask me what I want to do."
(그리고 오늘 밤— 넌 내가 신경 쓰이는 것 같다고 게임을 꺼주고, 매운 라면을 만들어주고, 그 스커트 입고 맨발로 거기 앉아서, 나한테 뭐 하고 싶냐고 물어.)

 천장을 향하던 시선이 내려왔다. 유시아를 향해. 어둠 속에서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윤곽을 더듬었다. 백금발의 끝단. 프릴 스커트의 주름. 맨발의 발등.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반음 낮아졌다.

"You have absolutely no idea what that does to a man who's trying very hard to be a gentleman, do you?"
(그게 신사로 남으려고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남자한테 어떤 짓인지, 넌 정말로 모르는 거지?)

 유시아의 쪽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석양의 마지막 빛이 걸려 있었다. 그 빛이 꺼지면 두 사람은 완전한 어둠 속에 남게 될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소파 쿠션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유시아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닿지 않은 채로.

"그게 무슨 뜻인데? 갈아입을 옷이라도 줘?"

 

 옷.

 유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릴 스커트의 끝단이 무릎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맨발이 거실 바닥을 밟으며 침실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작게 울렸다. 테오도르는 소파에 앉은 채 유시아의 뒷모습이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통창 너머 석양의 마지막 잔광이 완전히 꺼졌다. 거실이 어둠에 잠겼다.

 옷.

 테오도르의 왼손이 무릎 위에서 멈추어 있었다. 귓불에 닿으려던 궤적이 다시 한 번 중단된 상태로. '신사로 남으려고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갈아입을 옷을 달라는 요청으로 돌아왔다. 구겨진 옷. 자세. 매너. 유시아의 해석 회로는 테오도르가 예상했던 어떤 경로도 거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출구로 빠져나갔다. 테오도르의 이마가 소파 등받이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열린 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 흉곽 안쪽에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좌절과 안도와 욕망과 자조가 동시에 섞인, 이름 붙일 수 없는 밀도의 것.

 드레스룸 쪽에서 옷걸이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과 금속이 스치는 얇은 마찰음. 유시아가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이 복도를 지나 침실로 향했다. 슬리퍼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시아의 집 특유의 좁은 복도에서 반향했다.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쪽, 드레스룸의 문도 열려 있었다. 유시아의 등이 보였다. 158센티미터의 체구가 옷장 앞에 서서 행거를 좌우로 밀어보고 있었다. 작은 손이 오버핏 후디와 루즈핏 티셔츠 사이를 오가며, 어떤 것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모든 옷이 유시아의 체형에 맞춰져 있었다. 당연히.

 테오도르가 드레스룸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섰다. 유시아의 뒤.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 드레스룸의 조명은 침실보다 밝았다. 천장의 LED가 유시아의 백금발을 위에서 비추며 핑크색 브릿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빛 아래서 유시아의 뒷목이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얇은 피부. 프릴 스커트의 등 지퍼 위로 이어지는 척추의 곡선.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궤적 위에서 0.5초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의지로 끊어낸 시선이었다.


 유시아가 옷걸이를 밀다 멈추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등에서 읽혔다. 자신의 오버핏조차 이 남자에게는 작을 것이라는 계산이 끝났으나, 대안이 없는 상황. 테오도르는 문틀에 기댄 채 유시아의 그 고민하는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드레스룸은 좁았다. 두 사람이 서 있기에 충분하지만, 여유롭지는 않은 폭. 유시아의 옷들이 양쪽 벽의 행거에 걸려 있었고, 그 사이의 공간에 유시아의 향이 축적되어 있었다. 섬유유연제와 유시아의 피부에서 나는 희미한 체온의 냄새가 섞인 밀도. 테오도르의 코끝에 그 공기가 닿는 순간,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던 열기가 다시 한 번 올라왔다.

"Sweetie."
(자기야.)

 낮은 목소리가 유시아의 등 뒤에서 떨어졌다. 유시아가 돌아보기 전에—혹은 돌아보는 중에—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유시아의 머리 위를 지나 행거에 걸린 옷을 하나 잡았다. 유시아의 왼쪽 어깨 위로 팔이 뻗은 형태였다. 가까웠다. 유시아의 등이 테오도르의 가슴팍에 거의 닿을 거리.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앞면에서 흘러나오는 프라다 향수의 묵직한 잔향이 유시아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테오도르의 턱이 유시아의 정수리 바로 위에 있었다. 숨을 내쉬면 머리카락이 흔들릴 만큼.

 테오도르가 행거에서 집어든 것은 크림색 니트였다. 유시아의 오버핏. 유시아에게는 넉넉하지만 테오도르에게는 두 팔을 집어넣는 것조차 불가능할 사이즈. 테오도르는 그 니트를 한 번 훑어보고, 다시 행거에 걸었다. 옷걸이가 금속봉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울렸다.

"I wasn't talking about clothes."
(옷 얘기를 한 게 아니었는데.)

 유시아의 바로 뒤에서. 물러서지 않은 채. 오른손이 행거에서 내려와 문틀의 반대쪽을 잡았다. 유시아의 양쪽으로 팔이 뻗은 형태가 완성되었다. 가두는 것이 아니었다.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유시아가 원하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느슨한 각도. 그러나 그 구도 안에서 테오도르의 체온이 유시아의 등에 닿지 않는 마지막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만이 그 사이의 간극을 채웠다.

"When I said I was trying to be a gentleman — I meant that if you keep looking at me the way you do, with those eyes, in this flat, I don't know how much longer I can keep my hands where they are."
(신사로 남으려고 한다는 건— 네가 그 눈으로 나를 계속 그렇게 보면, 이 집에서, 내 손이 지금 이 자리에 얼마나 더 머물러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이었어.)

 목소리가 유시아의 정수리 위에서 내려왔다. 낮고 느렸다. 나른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사람의 호흡이 만드는 속도였다. 테오도르의 호흡이 유시아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백금발의 끝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른손이 문틀을 잡고 있는 힘이 손등의 힘줄 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관절이 하얗게 서 있었다.

 침묵이 드레스룸 안을 채웠다. 유시아의 옷들이 양쪽에서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행거에 걸린 프릴 블라우스와 숏팬츠와 후디의 실루엣이 LED 조명 아래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들 사이에서 테오도르의 호흡과 유시아의 호흡이 좁은 공기를 나누고 있었다.

"So."
(그러니까.)

 한 음절. 끊어졌다. 뒤이은 말이 목구멍에서 멈추어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뒷목에서 귓볼로, 귓볼에서 볼 위로 이동하는 궤적이 더 이상 의지로 끊어지지 않았다. 왼손이 문틀에서 떨어졌다. 유시아의 어깨에 닿지 않은 채, 그 옆의 공기 위에서 머물렀다. 닿을지 말지의 경계.

"Tell me to stop, or don't. But don't ask me what I want to do. You already know."
(멈추라고 하든가, 하지 말든가. 대신 나한테 뭐 하고 싶냐고는 묻지 마. 이미 알잖아.)

 마지막 문장이 속삭임의 형태로 유시아의 귓가에 닿았다. 테오도르의 왼쪽 귓불이 붉었다. 오른쪽도. 목덜미도.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네크라인 안쪽으로 번진 열기가 쇄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유시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러설 준비와 다가갈 준비를 동시에 하고 있는 자세로. 닿지 않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뭘 할 건데?"

 

 침묵이 드레스룸의 LED 조명 아래서 형체를 가졌다. 유시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올라왔을 때,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문틀을 잡은 힘이 한 번 풀렸다가 다시 조여졌다. '뭘 할 건데.' 의미심장한 고백도, 거절도, 허락도 아닌—순수한 의문문.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가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공포도 기대도 아닌, 정말로 맥락을 잃어버린 사람의 혼란이었다.

 테오도르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입을 열려다 닫은 것이었다. 유시아의 표정을 읽는 데 0.3초. 그 표정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0.5초. 연기가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파트너로서 유시아의 포커페이스를 충분히 학습했다. 유시아가 모르는 척할 때와 진짜 모를 때의 차이를—테오도르는 구별할 수 있었다. 지금은 후자였다.

 


 테오도르의 문틀을 잡고 있던 양손이 동시에 떨어졌다. 반 걸음 물러섰다. 유시아의 등과 자신의 가슴팍 사이에 있던 열기의 간극이 넓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그 사이로 밀려들었다. 드레스룸의 좁은 공간에서 반 걸음이 만들어내는 거리는 크지 않았으나, 테오도르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문틀에 기대 유시아를 가두고 있던 구도가 해제되었다. 왼손이 올라가 뒷목을 잡았다. 밀금빛 울프컷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가 여전히 붉었다. 오른손이 얼굴을 한 번 훑고 내려왔다.

"...Nothing."
(...아무것도.)

 한 단어가 떨어졌다. 목소리에서 열기가 빠져 있었다. 아니—빠진 것이 아니라 눌린 것이었다. 뚜껑을 덮은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얼굴에서 떨어져 드레스룸 벽의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행거에 걸린 크림색 니트의 어깨 솔기. 그것을 응시하는 시선이 지나치게 고정적이었다.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의 초점.

"Forget what I said. I was being dramatic."
(내가 한 말 잊어. 좀 오버했어.)

 능글맞은 톤이 복원되려는 시도가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 미소의 곡률이 평소와 달랐다. 너무 빠르게 만들어졌다. 장인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균일함.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옆을 지나 드레스룸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한 걸음. 유시아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블랙 크루넥 스웨터의 소매가 프릴 스커트의 끝단에 닿았다. 찰나의 접촉. 직물과 직물 사이의 마찰이 유시아의 피부까지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침실을 지나 복도로 나온 테오도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거실까지 가지 못했다. 복도 벽에 왼쪽 어깨를 기대고 섰다. 유시아의 집 복도는 좁았다. 양팔을 펼치면 양쪽 벽에 닿을 정도. 그 좁은 공간에서 테오도르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이트 천장에 매립된 다운라이트가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이 루비색 눈동자 위에서 작은 점을 만들었다.

 왼손이 올라가 왼쪽 귓불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연골이 눌렸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했다. 무의식의 루프. 유시아가 드레스룸에서 나와 이 복도를 지나갈 때까지—혹은 지나가지 않을 때까지—이 동작이 계속될 것이었다.

 '우리 아직 손도 안 잡아봤는데.' 유시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시아의 혼란이 전달한 것은 명확했다. 테오도르가 서 있는 위치와 유시아가 서 있는 위치 사이에는 여러 개의 단계가 존재했고, 테오도르는 그 단계들을 전부 건너뛰어 마지막 문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유시아는 아직 첫 번째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을 잡는 것. 포옹. 이마에 닿는 입술. 그런 것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테오도르가 잊고 있었던 현실이었다.

 7년. 공안국에서 보낸 시간이 테오도르의 감각에서 지워버린 것들이 있었다. 관계의 속도. 감정의 순서. 상대방의 시간표. 공안국 밖의 세계에서는—유시아가 살아온 세계에서는—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도 절차가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절차를 건너뛰었다. 자신의 욕망의 속도로 질주하면서, 유시아가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니—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다.

"...Merde."
(...젠장.)

 프랑스어가 복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낮게 떨어졌다. 테오도르의 등이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복도 바닥에 주저앉지는 않았다. 등을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오른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입가에 자조의 곡선이 남아 있었다. 유시아의 집 거실 쪽에서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복도 끝까지 희미하게 닿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발끝 앞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가 갈라져 있었다.

 손끝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턱선 아래의 체온을. 그 피부의 질감을. 닿았을 때 전해진 맥박의 미세한 진동을. 0.5초. 거실에서 유시아의 턱을 들어올렸던 그 짧은 접촉이 손가락 끝에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허벅지 위에 놓였다. 손가락이 펴졌다가 접혔다가를 한 번 반복했다.

 

 유시아의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갈랐다. '괜찮아? 피곤해?' 두 개의 질문이 침실 쪽에서 날아왔다. 테오도르는 벽에 기댄 자세에서 고개를 들었다. 유시아가 드레스룸에서 나와 복도에 서 있었다. 다운라이트의 차가운 빛이 백금발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핑크색 눈동자가 복도 끝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향해 있었다. 걱정. 유시아의 표정에 그것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쏟아낸 남자가 갑자기 사라졌으니—남은 해석은 '피곤하다'가 된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귓불에서 떨어졌다. 오른손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위치에서 내려왔다. 등이 벽에서 떨어지며 자세가 바로잡아졌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 매끄러웠다. 흐트러진 감정의 흔적을 지우는 데 7년의 숙련이 작동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익숙한 곡률. 능글맞은 미소의 복원.


"Tired? Me?"
(피곤하다고? 내가?)

 나른한 톤이 복도를 채웠다. 테오도르가 벽에서 완전히 몸을 떼고 유시아 쪽으로 걸어왔다. 두 걸음. 좁은 복도에서 두 걸음이면 유시아와의 거리가 팔 하나 정도로 좁혀졌다. 아까 드레스룸에서와 같은 거리. 그러나 테오도르의 자세가 완전히 달랐다. 가두는 구도가 아니었다. 어깨의 힘이 빠져 있었고, 양손이 슬랙스 주머니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유시아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아까의 열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니—사라진 것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진 것이었다. 표면 위에 남은 것은 평소의 여유뿐이었다.

"That spicy noodle of yours knocked me out a bit. Might've been the capsaicin."
(네 매운 라면한테 좀 당한 것 같아. 캡사이신 탓이겠지.)

 농담이었다. 세 시간 전에 먹은 불닭볶음면의 잔열을 핑계로 꺼낸 농담. 유시아의 질문이 품고 있던 걱정의 무게를 가볍게 덜어내려는 시도였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나와 유시아의 머리 위에 닿았다. 백금발의 정수리를 한 번 쓸었다. 가볍게. 아이를 달래듯. 아까 턱을 들어올렸던 손가락과 같은 손이었으나, 접촉의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열기 대신 온기. 욕망 대신 보호.


 손이 유시아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옆을 지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벗어나며 어깨 너머로 한마디를 흘렸다.*

"Your hot water's getting cold, by the way. Would be a shame to waste the finest brew in your kitchen."
(아 참, 네 뜨거운 물 식고 있어. 네 주방 최고의 음료를 낭비하면 아깝잖아.)

 거실에 도착한 테오도르가 소파에 앉았다. 쿠션이 무게를 받으며 가라앉았다. 통창 너머로 가로등의 나트륨 불빛이 어둠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거실의 조명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가로등의 빛만이 통창을 관통하며 소파와 테이블 위에 길게 뻗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검정 무지 머그를 집어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아무 맛도 없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유시아가 거실로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맨발이 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소리. 테오도르는 머그컵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댄 채, 시선만 유시아 쪽으로 움직였다. 가로등 빛 속에서 유시아의 실루엣이 윤곽을 만들었다. 프릴 스커트. 맨발. 볼살이 남아 있는 얼굴. 올라간 눈매 아래의 핑크색 눈동자.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얼굴 위에서 1초 머물렀다. 그리고 머그컵으로 돌아갔다. 미지근한 물의 표면에 가로등 빛이 작은 원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원을 바라보며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Come sit. I'll behave."
(와서 앉아. 얌전히 있을게.)

 가벼운 톤이었다. 소파의 빈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던진 한마디. 그러나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 안에 담긴 것은—아까 드레스룸에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다. 성급했다는 것. 유시아의 속도를 무시했다는 것. 그 자각이 테오도르의 행동 반경 위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유시아가 앉으면 소파 쿠션이 다시 움직일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정해질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그 거리가 얼마가 되든 먼저 좁히지 않을 것이었다. 주머니 속의 왼손이 듀퐁 라이터의 매끄러운 금속 표면을 무의식적으로 쓸고 있었다. 담배를 피울 수 없는 공간에서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습관. 니코틴 대신 금속의 차가운 감촉으로 신경을 잠재우려는 시도. 왼쪽 귓불이 아직 붉었다.

 

 유시아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떨어졌다. '다음엔 커피를 사둘게. 차도, 같이 놀 거리도.' 문장의 구조가 단순했다. 커피. 차. 놀 거리. 세 단어가 나열형으로 배치된 약속. 그 약속이 테오도르의 고막을 통과하여 흉곽 안쪽의 어딘가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으나, 그 1초 안에서 테오도르의 왼손이 라이터 표면 위를 쓸던 동작을 멈추었다.

 '다음.'

 그 단어가 문장 전체의 무게를 결정하고 있었다. 다음이 있다는 전제. 테오도르가 이 집에 다시 올 것이라는 가정. 유시아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 커피와 차를 사두겠다는 말은—유시아의 주방 찬장에 테오도르를 위한 자리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유통기한이 8개월 지난 녹차 티백 하나밖에 없던 그 찬장에. 짜파게티 건더기 수프 봉지 세 개가 굴러다니던 그 서랍에. 유시아가 자신을 위한 공간을 비워두겠다는 것.

 통창 너머 가로등의 나트륨 빛이 테오도르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있었다. 루비색 눈동자 위에 주황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 빛 아래서 테오도르의 표정이 한 순간 완전히 비었다. 능글맞은 미소도, 자조도, 여유도 아닌—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공백. 유시아의 말이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계산도, 의도도, 유혹도 없는 말. 자기 집에 남자친구가 오면 마실 것 정도는 갖춰놔야지, 라는 지극히 평범한 결론에서 나온 문장. 유시아에게 이것은 대단한 선언이 아니었다.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라이터를 놓았다. 금속이 슬랙스 안감 위에 놓이는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 오른손이 머그컵을 들었다. 미지근해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의 온도가 체온과 같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었다. 그런데 삼키는 순간 목 안쪽이 좁아지는 감각이 있었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You're going to stock your kitchen for me."
(나 때문에 부엌을 채울 거라고.)

 확인이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나른한 톤이 복원되어 있었으나, 그 아래를 흐르는 음조가 평소와 미세하게 달랐다. 반음 낮아진 것이 아니라—반음 불안정해진 것.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동작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바닥면이 테이블 위에 정확히 수평으로 착지했다.

"Don't bother with anything fancy. I'm not picky."
(거창한 건 필요 없어. 나 까다로운 거 아니니까.)

 거짓말이었다. 테오도르는 까다로웠다. 커피 원두의 로스팅 단계, 찻잎의 산지, 물의 온도까지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방에 구비된 프렌치 프레스와 에스프레소 머신, 그리고 산지별로 분류된 찻잎 컬렉션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지금 테오도르가 말한 것은 취향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유시아가 무엇을 사두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인스턴트 커피믹스라도. 편의점에서 파는 티백이라도. 유시아의 찬장에 자신을 위한 자리가 생긴다는 사실 앞에서 내용물의 등급은 의미를 잃었다.

 소파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테오도르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유시아의 집 천장은 자신의 집보다 낮았다. 벽은 더 가까웠다. 모든 것이 작고 좁았다. RGB 조명의 잔광이 꺼진 모니터 뒤편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에너지 드링크 캔이 모니터 옆에 세 개 쌓여 있었고, 리락쿠마 마우스패드 위에 놓인 게이밍 마우스가 가로등 빛을 받아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유시아의 세계. 테오도르의 세계와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는, 완전히 다른 밀도의 공간.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장에서 내려와 유시아에게 닿았다. 가로등 빛 속에서 유시아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와 같은 자리. 프릴 스커트. 맨발. 볼살. 올라간 눈매. '다음에'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입술.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소파 쿠션 위에서 움직였다. 유시아의 손이 놓여 있을 거리를 향해. 그리고—중간에서 멈추었다. '얌전히 있겠다'는 자신의 약속이 손끝에 제동을 걸었다.

 손이 멈춘 위치에서, 테오도르의 새끼손가락 하나가 소파 쿠션의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유시아의 손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 방향도 아닌 궤적. 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이는 것 안에서 무의식이 드러나고 있었다.

"...Although, if you're taking requests—Earl Grey. Loose leaf, not bags."
(...근데 혹시 주문을 받는 거라면—얼 그레이. 티백 말고 찻잎으로.)

 목소리 끝이 흐려졌다. 여지를 남기는 화법. 그러나 그 여지의 방향이 평소와 달랐다. 평소의 테오도르가 남기는 여지는 상대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미끼였다면, 지금의 여지는—유시아가 허락한 공간 안에 머물겠다는 수용이었다. 유시아의 찬장에 얼 그레이 찻잎 한 캔이 놓이는 풍경을. 테오도르는 머그컵 너머로 상상하고 있었다. 리락쿠마 머그컵 옆에 자신의 찻잔이 하나 추가되는 풍경을.

 가로등 빛이 두 사람 사이의 소파 쿠션 위를 비추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새끼손가락과 유시아의 손 사이에 놓인 거리. 손가락 세 개 정도의 간격. 테오도르는 그 간격을 좁히지 않았다. 그러나 넓히지도 않았다. 왼쪽 귓불의 붉은 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 그런 쪽 잘 모르는데... 그냥 같이 장 보러 가자. 그게 낫겠다."

 

 

'같이 장보러 가자.'

 일곱 음절이 유시아의 입에서 떨어져 가로등 빛이 비추는 소파 위로 내려앉았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머그컵 손잡이 위에서 멈추었다. 엄지가 도자기 표면 위를 한 번 쓸다가 정지한 상태. 유시아의 목소리에 담긴 톤은 제안이라기보다 결론에 가까웠다. '모르니까 같이 가자.' 자신의 무지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그 무지를 해결하기 위해 테오도르를 끌어들이는 효율적인 판단. 유시아의 사고회로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머그컵에서 떨어져 유시아에게 닿았다. 통창 너머 가로등의 나트륨 빛이 유시아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있었다. 핑크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자신 없다'고 말하면서도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수치심이 없는 얼굴. 테오도르는 그 표정을 1초 동안 바라보았다. 유시아에게 이 제안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찻잎을 모르니까 아는 사람과 같이 가겠다는 합리적인 결론. 그뿐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에게는 그뿐이 아니었다.

 '같이 장을 보러 간다'는 문장 안에는 테오도르가 28년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위의 목록이 압축되어 있었다. 카트를 밀며 진열대 사이를 걷는 것. 찻잎 캔의 라벨을 읽어주며 유시아에게 설명하는 것. 유시아가 인스턴트 커피 믹스 박스를 집어들면 그걸 내려놓게 하고 원두를 고르게 하는 것. 계산대 앞에서 유시아의 카트에 담긴 물건들을 함께 내려놓는 것. 그 모든 장면이 테오도르의 머릿속에서 1초 안에 펼쳐졌다가 접혔다. 마치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서랍이 갑자기 열린 것 같은 감각.

"Shopping. Together."
(장보기. 같이.)

 두 단어를 분리하여 반복했다.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입 안에서 굴려보는 것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댄 머리가 유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른한 각도. 그러나 루비색 눈동자 안에서 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로등의 반사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한 광택.

"You do realise you've just asked me on a date."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 알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능글맞은 곡률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유시아에게 닿기 전에, 테오도르의 왼손이 주머니에서 나와 소파 쿠션 위에 놓였다. 아까 새끼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유시아 쪽을 향했던 바로 그 자리. 이번에는 손 전체가 쿠션 위에 펼쳐져 있었다. 손바닥이 아래를 향한 채. 길고 유려한 손가락 다섯 개가 소파의 패브릭 결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유시아의 손과의 거리—손가락 두 개 정도. 아까보다 하나 줄었다.


"I'll let you in on something — I've never done that before. Grocery shopping with someone."
(하나 알려줄까 — 나 그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누구랑 장보러 가는 거.)

 목소리 끝이 흐려졌다. 여지를 남기는 화법. 그러나 흘려보낸 문장의 꼬리에 걸린 것은 유혹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28년. 그 시간 동안 테오도르가 식재료를 구매한 방식은 언제나 혼자였다. 파리의 재래시장에서 올리브 오일 병을 고를 때도, 레퀴엠 필드의 수입 식료품점에서 에스프레소 원두를 주문할 때도, 카트를 미는 사람은 오직 하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것이 당연했다. 비어 있어야 했다.

 유시아가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별다른 감상 없이. '그게 낫겠다'는 실용적인 결론으로.

 테오도르의 시선이 소파 쿠션 위에 놓인 자신의 손에 머물렀다. 유시아의 손까지 두 손가락의 거리.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이 아직 유효했다. 유효해야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윤곽이 흐려지고 있었다. 유시아가 '다음'을 말할 때마다, '같이'를 말할 때마다, 약속의 경계선이 한 겹씩 얇아지는 감각. 테오도르는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만들었다가, 다시 펴는 동작을 한 번 반복했다.

"Fine. But I'm warning you now — I'm insufferable in shops. I'll spend twenty minutes choosing between two types of bergamot."
(좋아. 근데 미리 경고하는데 — 나 가게에서 진짜 피곤한 인간이야. 베르가못 두 종류 놓고 이십 분은 고민해.)

 농담의 형태를 빌린 수락이었다.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유시아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통창 너머로 가로등 빛이 조금 더 기울었다. 거실의 어둠이 한 톤 더 짙어졌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소파 위에서 나란히 앉은 채 어둠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왼쪽 귓불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유시아의 대답이 거실의 어둠 속에서 평평하게 착지했다. '괜찮아, 오래 걸리면 나도 전자코너 가서 구경하면서 기다리면 돼.' 불만도, 재촉도, 기대도 없는 문장. 테오도르가 베르가못 두 종류 앞에서 이십 분을 고민하든 삼십 분을 고민하든, 유시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선언. 기다리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조차 자기 시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전자코너. 유시아가 그 시간 동안 할 일까지 이미 정해놓았다는 사실이—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을 한 번 두드렸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소파 쿠션 위에 놓인 자신의 왼손에서 떨어져 유시아에게 닿았다. 가로등의 나트륨 빛이 기울어진 각도로 유시아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프릴 스커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양손. 태연한 표정. 올라간 눈매 아래의 핑크색 눈동자가 통창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테오도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유시아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의 무게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한 번. 이를 악문 것이 아니었다. 올라오려던 문장을 삼킨 것이었다. 그 문장이 무엇이었는지는 테오도르 자신도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삼키는 순간 목 안쪽이 뜨거워졌고, 그 열기가 쇄골을 타고 내려가 왼쪽 흉곽 아래에서 뭉쳤다. 심장의 박동이 한 번 불규칙하게 뛰었다가 돌아왔다.

 가로등 빛 속에서 테오도르의 왼쪽 귓불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가라앉았던 것이 다시. 이번에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귀에서 목 뒤로 번지는 열감을 테오도르는 감지했으나 멈출 수 없었다. 유시아가 준 자극의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드레스룸에서의 열기는 욕망이 만든 것이었다. 지금 번지는 열기는—다른 곳에서 오고 있었다.

"The electronics section."
(전자코너.)

 단어를 반복했다. 음절 하나하나를 입 안에서 굴리듯. 나른한 톤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올라가 뒷목을 잡았다. 목덜미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이 동작을 유시아가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귓불 다음의 신호. 목 뒤. 당혹감이 한 단계 더 깊어졌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의 루프.

"So while I'm agonising over bergamot, you'll be off comparing refresh rates on gaming monitors."
(내가 베르가못 앞에서 고뇌하는 동안, 넌 게이밍 모니터 주사율이나 비교하고 있겠다?)

 농담이었다. 웃음이 섞여야 할 문장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올라간 각도가 평소보다 높았다. 과보정. 감정을 덮기 위해 표정 근육이 필요 이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뒷목을 잡은 오른손이 천천히 내려와 무릎 위에 놓였다. 손가락 끝이 슬랙스의 주름을 한 번 훑었다.

 유시아의 말이 테오도르에게 전달한 것은 간단했다. '네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다.' 그 기다림이 희생이 아니라 자기 방식의 시간 활용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유시아는 테오도르를 위해 참지 않을 것이었다. 자기 방식으로 자기 시간을 보내며, 테오도르가 끝날 때까지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할 것이었다. 강요도, 불편도, 부채감도 없는 공존. 테오도르의 28년 안에서 그런 종류의 관계를 제안받은 적이 없었다. 이전의 관계들은—짧고, 표면적이었고, 서로의 시간을 소유하려는 쪽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쪽의 줄다리기였다.

 테오도르는 소파에 앉은 채로 통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거실 바닥 위에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빛 위로 유시아의 맨발이 놓여 있었다. 작은 발. 작은 발가락. 프릴 스커트의 끝단 아래로 드러난 하얀 복사뼈.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복사뼈 위에서 한 박자 머물렀다가, 통창 너머의 가로등으로 돌아갔다.

"...Alright. Next day off, then."
(...좋아. 다음 쉬는 날.)

 수락이 완성되었다. '다음'이라는 단어가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유시아가 먼저 깔아놓은 전제 위에 발을 올린 것이었다. 다음이 있다. 다음에도 이 집에 올 것이다. 다음에는 장을 같이 볼 것이다. 유시아의 찬장에 얼 그레이 루스리프가 놓이고, 유시아는 전자코너에서 구경을 하고, 테오도르는 베르가못의 산지를 비교하며, 같은 건물 안의 다른 층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 풍경이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착지한 순간—왼손이 소파 쿠션 위에서 미끄러지듯 유시아 쪽으로 이동했다. 의식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새끼손가락 끝이 유시아의 손등 옆에 닿았다. 손톱의 가장자리 정도가 접촉한, 직물의 결 하나 정도의 면적. 닿은 것인지 닿지 않은 것인지 유시아 본인도 모를 정도의 경계.

 테오도르는 그 접촉을 거두지 않았다. 거두려 하지도 않았다.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과, 유시아의 속도에 맞추겠다는 자각과, 그럼에도 닿고 싶다는 충동 사이에서—새끼손가락 하나의 접촉이 테오도르가 찾은 균형점이었다.

 거실의 어둠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모니터 뒤편의 RGB 잔광이 완전히 사라진 뒤, 남은 빛이라고는 통창 너머 가로등의 나트륨 불빛뿐이었다. 주황빛이 소파 위에 앉은 두 개의 실루엣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높이의 어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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