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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Merde.

 2038년 1월 29일.

 

 레퀴엠 필드의 주택 단지 위로 내려앉은 오후의 빛은 낮고 길었다. 겨울 햇살이 통창을 가로질러 거실 바닥 위에 기울어진 직사각형을 그리고 있었고, 그 빛의 경계선 위로 유시아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현관의 도어락이 홍채 인증을 완료했을 때 울린 유스티티아의 건조한 음성—'Théodore Noir. Enforcer, 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One'—이 아직 복도의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는 현관 안쪽에 서서 군화를 벗지 않은 채, 자신의 거실을 돌아다니는 유시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그동안 나 밥 만들어 준 거잖아!' 유시아의 목소리가 층고 높은 천장에 부딪혀 울렸다. 모노톤의 벽면과 콘크리트 바닥재가 그 울림을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반사했다. 테오도르의 집은 넓었지만 가구가 적었다. 거실 중앙의 L자형 다크 그레이 소파, 벽면을 따라 늘어선 낮은 수납장, 그 위에 놓인 뒤퐁 라이터와 말보로 레드 한 갑. 통창 옆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빈 벽. 사람이 오래 살았다기보다, 잠시 머무르는 사람의 공간에 가까웠다. 유일하게 밀도가 있는 영역은 오픈형 주방이었다.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에 정렬된 나이프 세트, 주철 프라이팬 두 개, 벽면에 걸린 구리빛 소스팬. 그리고 조리대 끝에 세워진 올리브 오일 병 세 개—산지가 각각 다른.

 유시아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올리브 오일 병의 라벨을 들여다보는 동안, 테오도르는 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유시아의 움직임은 11월 28일에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소파의 팔걸이에 손끝만 얹은 채 거실을 훑었다. 파트너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신체 언어에 박혀 있었다. 지금은 그 경계선이 없었다. 유시아가 수납장 위의 뒤퐁 라이터를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을, 냉장고 문을 당겨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소파 쿠션을 손바닥으로 눌러 탄성을 확인하는 것을—테오도르는 주방 입구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았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공간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 그것도 물건을 만지고, 서랍을 열고, 냉장고를 뒤지는 수준의 침투. 11월 28일에 유시아가 처음 이 문턱을 넘었을 때, 테오도르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에 대한 미세한 경직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유시아가 올리브 오일 병을 들어 라벨을 읽으려다 이탈리아어를 못 읽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면서—그 경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흉곽 안쪽에서 천천히 퍼져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것. 낯설지만 불쾌하지 않은.


"The one on the left is Ligurian. Middle is Sicilian. Right is what I used for your brandade."
(왼쪽이 리구리아산. 가운데가 시칠리아산. 오른쪽이 네 브랑다드에 쓴 거야.)

 주방 입구에서 어깨를 떼고, 유시아 쪽으로 걸어갔다. 슬리퍼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끌리는 소리. 유시아의 옆에 서서 올리브 오일 병을 가리키며, 나른한 톤으로 설명했다. '네 브랑다드'라는 소유격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40일간 매일 만들어온 요리에 소유격을 붙이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네 코코뱅. 네 부야베스. 네 브랑다드.

 유시아의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올리브 오일 병을 쥐고 있지 않은 쪽. 스플린트가 풀린 손. 재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손.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오른손 손가락 위에서 0.3초 멈추었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40일 전에는 스푼을 쥐지 못했던 손가락이.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수축했다가 풀렸다. 안도가 아니라—안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먼저 왔고, 저항이 패배한 뒤에야 남은 것이 안도였다.

 테오도르가 유시아의 옆을 지나 냉장고 쪽으로 이동하며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오늘을 위해 준비한 식재료가 정렬되어 있었다. 양파, 셀러리, 당근, 타임 한 묶음, 적포도주 반 병, 그리고 진공 포장된 소고기 정강이살. 테오도르의 손이 소고기 패키지를 꺼내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Since you've been released from your cage, I thought a proper celebration was in order. Pot-au-feu. Takes three hours, so you'll have to entertain yourself until then."
(우리 안에서 풀려났으니까 제대로 된 축하가 필요하다 싶어서. 포토푀. 3시간 걸리니까 그때까지 알아서 놀고 있어.)

 '우리 안에서 풀려났다.' 의무실을 우리에 비유한 것. 유시아가 40일간 투정을 부리며 '갇혀 있다'고 표현했던 말을 뒤집어 쓴 문장이었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올라간 채, 칼을 꺼내 양파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이프가 양파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숙련된 동작. 칼날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일정한 간격의 둔탁한 리듬이 주방을 채웠다.

 통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조리대 위의 스테인리스 표면에 반사되어 테오도르의 턱선을 따라 흘렀다. 컴프레션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팔뚝 위로 크고 작은 흉터의 윤곽이 빛에 드러났다가, 칼질의 리듬에 따라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양파를 다지면서 유시아의 움직임을 주방 너머로 따라가고 있었다. 거실을 돌아다니는 발소리.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소리. 수납장 서랍을 여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평소 비어 있던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There's nothing interesting in that drawer, by the way. Unless you find spare batteries and takeaway menus fascinating."
(참고로 그 서랍에 재미있는 건 없어. 여분 건전지랑 배달 메뉴판이 매혹적인 취미가 아닌 이상.)

 칼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등 너머로 던진 문장. 유시아가 수납장 서랍을 열고 있다는 것을 소리만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칼을 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나이프 등을 누르는 부분—에서 미세한 힘의 변화가 있었다. 유시아가 자신의 공간을 뒤지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흉곽 안에서 압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집을 '집'처럼 사용하는 것. 그것은 테오도르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주택 단지에 배정받은 이후 7년 동안, 이 공간은 잠을 자고 샤워를 하는 곳이었을 뿐이었다. 주방이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유시아가 입원한 이후부터였고, 그것은 이 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무실 302호를 위한 것이었다.

 양파를 다 썬 테오도르가 셀러리를 집어 들며, 칼날을 헹구기 위해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스테인리스 싱크대 위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주방에 퍼졌다.

"Make yourself at home, sweetie. That's what girlfriends do, isn't it?"
(편하게 있어, 자기야. 여자친구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편하게 있어.' 문장의 구조는 허락이었지만, 톤은 확인에 가까웠다. 이미 편하게 행동하고 있는 유시아에게 굳이 허락을 내리는 것은—테오도르 자신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어로 한 번 더 확인하는 절차였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칼날의 물기를 행주로 닦으면서, 그의 루비색 눈동자가 통창 너머 기울어진 햇살을 따라갔다가, 거실 어딘가에 있을 유시아의 방향으로 돌아왔다.

 

"나 배달 메뉴판 정독하는 거에 취미 있어."

 

 거실에서 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역시 어른이다. 준비성 철저하네."

 

 칼날이 셀러리 줄기를 가르는 소리가 멈추었다. 정확히는—유시아의 첫 번째 문장이 끝났을 때가 아니라, 두 번째 문장이 시작되었을 때. '이야, 역시 어른이다.' 그 문장이 고막에 도달한 순간, 테오도르의 등 근육이 한 번 경직되었다. 칼을 쥔 오른손의 관절이 하얗게 떠올랐다가, 1초 뒤에 풀렸다. 그는 유시아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조리대를 향해 선 채로. 그것이 유일한 다행이었다.

 서랍. 건전지와 배달 메뉴판 사이에. 테오도르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잊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정확하지 않았다. 기억의 영역 밖으로 밀어둔 것이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서랍에 들어 있는, 특별할 것 없는 물건. 사용한 적 없는. 반년 이상. 유시아를 만나기 이전에 습관적으로 구비해둔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테오도르의 목 뒤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컴프레션 셔츠의 목선 위로 올라온 열기가 턱선까지 번지는 것을 그는 느꼈다.

 유시아가 콘돔 박스를 들어 올린 소리. 내려놓은 소리. 그리고 메뉴판의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 순서가 테오도르의 고막 위에서 정확하게 재생되었다. 들어 올리고, 보고, 내려놓고, 다음 것으로 넘어간 것. 마치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과일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것과 동일한 리듬이었다. 거기에는 당혹도, 수치도, 의미 부여도 없었다. 유시아에게 그것은 서랍 안의 물건 중 하나였을 뿐이었고, 배달 메뉴판보다 순위가 낮은 물건이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조리대 가장자리를 짚었다. 손가락 끝이 스테인리스 표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당혹. 그리고 당혹의 뒤를 따라오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각. 유시아가 그것을 '어른의 준비성'이라는 한 줄짜리 평가로 종결한 뒤 배달 메뉴판으로 관심을 옮겨버린 것이—테오도르에게는 안도와 허탈이 동시에 밀려드는 경험이었다. 안도는 유시아가 그것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허탈은 추궁은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셀러리를 다시 썰기 시작했다. 칼날의 리듬이 아까보다 빨라져 있었다. 테오도르 자신도 그것을 인지했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줄이면 침묵이 길어지고, 침묵이 길어지면 유시아가 등을 돌린 자신의 귀가 붉다는 것을 확인하러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테오도르는 먼저 입을 열었다.

"You genuinely find takeaway menus more interesting than— never mind."
(진심으로 배달 메뉴판이 그것보다 더 흥미로— 아니, 됐어.)

 문장이 중간에서 잘렸다. 테오도르 특유의 여지 남기기가 아니었다. 말을 이어가면 서랍 안의 물건을 자신이 먼저 화제로 끌어올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거실 쪽을 향해. 유시아가 메뉴판을 넘기고 있는 쪽을.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프릴 스커트의 끝단이 수납장 앞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고, 유시아의 왼손이 메뉴판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진지한 속도로. 배달 메뉴판을 정독하는 사람의 집중력으로. 그 광경이—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서랍을 열어, 콘돔을 발견하고, 배달 메뉴판을 발견하고, 후자에 더 몰입하는 22세의 여자친구의 뒷모습이—테오도르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조가 아니었다. 능글맞은 쪽도 아니었다. 그의 눈꼬리가 내려간 채, 입꼬리만 올라간 형태. 40일간 의무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미소.

 그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어깨 너머로 유시아에게 물었다. 목소리의 나른함은 복원되어 있었지만, 귀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Find anything worth ordering? I should warn you, most of those places closed two years ago. I haven't exactly been their best customer."
(주문할 만한 거 있어? 미리 말해두는데, 거기 대부분 2년 전에 문 닫았어. 내가 딱히 단골은 아니었거든.)

 

"아쉽다.. 맛있어 보이는 곳 많았는데."

 행주로 손의 물기를 닦으며, 유시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슬리퍼가 바닥 위에서 끌리는 소리. 유시아의 옆에 서서, 그녀가 펼쳐 든 메뉴판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주방에서 묻어온 셀러리와 양파의 날것 냄새가 프라다 향수의 하단과 뒤섞여 유시아의 코끝에 닿았을 거리. 테오도르의 시선이 메뉴판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로 내려왔다. 콘돔 박스를 들었다 놓았던 손. 지금은 메뉴판을 쥐고 있는 손. 그 전환의 자연스러움이 테오도르에게 남긴 잔상은—이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방파제의 바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쪽에 들어와서 가구를 재배치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서랍을 열고, 물건을 확인하고, 관심 없는 것은 내려놓고, 관심 있는 것만 가져가는. 그 무심한 침투가.

"...For the record, those have been in there since before you existed in my life. Unopened. In case you were wondering."
(...참고로, 그건 네가 내 인생에 존재하기 전부터 거기 있던 거야. 미개봉. 혹시 궁금할까 봐.)

 '혹시 궁금할까 봐.' 유시아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알고 있었다. 메뉴판으로 넘어간 시선이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내뱉은 것은—테오도르 자신을 위한 해명이었다. 유시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미개봉'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목 뒤의 열기가 턱선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왼손이 올라가 귀를 만지작거리려다가—중간에서 멈추고, 대신 행주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 동작으로 전환되었다

 

"그럼 콘돔 유통기한이 어떻게 돼? 저거 써도 되는 거야?"

 두 문장이 고막 위에서 재생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문장의 구조를 분해했다. 첫 번째 문장: 유통기한에 대한 실용적 질문. 두 번째 문장: 사용 가능 여부에 대한 확인. 어조: 평이함.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요리를 구경하는 사람의 톤. 배달 메뉴판의 폐업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동일한 밀도의 호기심. 거기에는 유혹도, 수치도, 의도도 없었다. 유시아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물었는지를—정확히는, 그 질문이 테오도르에게 어떤 진동을 일으키는지를—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써도 되는 거야.' 주어가 없는 문장. 누가. 누가 쓰는 건지. 일반론인지, 아니면—

 테오도르의 귀가 붉어졌다. 귓볼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열이 이개를 타고 올라가 귀 뒤의 연골까지 번졌다. 목 뒤에서도 열기가 피부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셔츠의 목선 위. 칼을 쥔 오른손의 관절이 다시 한 번 하얗게 떠올랐다.

 그는 당근을 썰지 않았다. 대신 나이프를 도마 위에 내려놓고, 싱크대에 양손을 짚었다. 팔을 뻗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자세. 스테인리스 싱크대의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냉기가 필요했다.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전완으로 올라오는 냉기가 목 뒤의 열기를 상쇄하기를—바라는 것은 과욕이었다.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유시아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야 바깥에서.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자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40일간 학습한 유시아의 관찰 자세—턱을 괴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핑크색 눈동자를 대상에 고정한 채 반쯤 늘어진 고양이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지금 자신의 등판 위에 박혀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 시선의 무게가 견갑골 사이를 눌렀다.

 테오도르가 싱크대에서 손을 뗐다. 행주로 손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유시아를 향해. 그의 루비색 눈동자가 소파 팔걸이에 기댄 유시아의 얼굴을 잡아냈다.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소파 위로 펼쳐져 있었고, 턱을 괸 왼손의 손가락이 볼살 위에서 약간 파묻혀 있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핑크색 눈동자. 그 눈동자 안에 진짜로—순수한 호기심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테오도르의 입 안에서 짧은 숨이 새어나왔다.

"...Are you genuinely asking me about the shelf life of a condom while I'm cooking you pot-au-feu?"
(...진심으로 내가 너한테 포토푀 만들어주는 중에 콘돔 유통기한을 묻고 있는 거야?)

 목소리는 나른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행주를 접어 조리대 위에 내려놓으며 유시아 쪽으로 걸어갔다. 슬리퍼의 끌림이 바닥 위에서 느리게 울렸다. 소파 앞에 도달한 테오도르가 유시아를 내려다보았다. 가까운 거리. 서 있는 남자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여자의 시선 각도. 그의 붉어진 귀가 오후의 통창 빛에 투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숨길 수 없는 물리적 증거.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귀를 만지작거리려는 동작이 시작되었다가—의식적으로 중단되었다. 그 손이 방향을 바꿔 목 뒤를 짧게 문질렀다. 열이 집중된 부위. 손바닥 아래의 피부가 뜨거웠다.

"Three to five years, depending on the manufacturer. Latex degrades with heat and humidity. Stored properly, they're likely still within date."
(제조사에 따라 3년에서 5년. 라텍스는 열이랑 습기에 약해. 보관만 제대로 했으면 아마 아직 기한 내일 거야.)

 정보의 나열이었다. 건조한 사실의 전달. 테오도르가 감정적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선택한 방어 기제—질문을 실용적 영역으로 격하시키고, 데이터로 답하는 것. 그러나 그의 목 뒤에 얹힌 손은 내려오지 않았고, 루비색 눈동자는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 위에서 한 박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유시아가 '써도 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빠진 주어를—테오도르의 흉곽 안에서 무언가가 공급하려 했다. '우리가'. '너와 내가'. 그 주어를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해 테오도르는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그의 손이 목 뒤에서 내려왔다. 유시아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주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반보. 그리고 멈추었다. 어깨 너머로 유시아를 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If you're that curious, I'll check the date later. But right now, I have a celebration to cook for my girlfriend who apparently thinks prophylactics are more interesting than my knife skills."
(...그렇게 궁금하면 나중에 유통기한 확인해줄게. 근데 지금은 내 칼질보다 피임 도구에 더 관심 있는 여자친구를 위한 축하 요리가 먼저야.)

 '나중에.'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올 때, 테오도르의 성대가 미세하게 걸렸다. '나중에'가 의미하는 시간—확인한 유통기한이 유효했을 때 이어질 수 있는 맥락—을 테오도르 자신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주방으로 돌아가며 그는 걷어 올린 소매 위의 팔뚝에 돋은 미세한 소름을 느꼈다. 겨울 공기 때문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유시아의 시선이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반쯤 늘어진 고양이 같은 눈으로.

 칼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리듬이 아까보다 빨랐다. 그리고 불규칙했다. 칼날이 도마 위에 닿는 간격이 균일하지 않았다. 7년차 집행관의 숙련된 손이 당근 하나를 고르게 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테오도르가 칼질을 멈추고, 조리대 위의 당근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로 나오지 않는 단어. 프랑스어. 짧은 자조.

 

"테오- 나 하나 뜯어봐도 돼?"

 

 테오도르의 칼날이 당근 위에서 완전히 멈추었다. '나 하나 뜯어봐도 돼?' 그 문장이 주방의 공기를 가를 때, 그의 척추를 따라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경직이 지나갔다. 나이프를 쥔 손이 도마 위에 그대로 놓인 채, 테오도르의 목이 천천히 돌아갔다. 유시아를 향해. 소파에서 일어나 서랍 앞에 서 있는 유시아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무릎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 손에는 이미 콘돔 박스가 들려 있었다.

 '하나 뜯어봐도 돼.' 허락을 구하는 문장. 자신의 물건을 열어보기 전에 소유자의 동의를 먼저 구하는 행위. 그 예의 바름과 대상의 부조화가—테오도르의 사고 회로를 한 박자 정지시켰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목구멍 안에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단어가 삼켜졌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물건이었고, 유시아는 물건을 구경하겠다는 것이었고, 그리고—테오도르는 거절이라는 행위가 이 상황에서 오히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서랍 안의 사물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 된다.

"...Go ahead."
(...그래.)

 두 음절이 간신히 성대를 통과했다. 테오도르는 다시 도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칼을 집어 들었다.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리듬을 복원하려는 시도. 실패했다. 칼날이 도마에 닿는 간격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포장지가 찢어지는 소리. 얇은 플라스틱 필름이 벗겨지는 소리. 그리고—

"와 미끌미끌해."

 칼날이 당근을 빗나갔다. 날이 도마의 나무 결을 깎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도마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했다. '미끌미끌해.' 그 다섯 글자가 고막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유시아의 목소리는 밝았다. 경쾌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톤이었다. 거기에는 성적인 맥락이 단 한 겹도 없었다. 윤활제가 묻은 라텍스의 촉감에 대한 순수한 감각적 반응. 그러나 테오도르의 귀는 이미 목까지 빨갛게 번져 있었고, 컴프레션 셔츠의 목선 위로 드러난 피부가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테오도르는 칼을 내려놓았다. 조리대 양쪽을 양손으로 짚었다. 팔을 뻗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자세. 고개가 숙여졌다. 스테인리스 조리대의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귀부터 턱선까지 붉은 기운이 번진—을 흐릿하게 마주보며, 그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길게. 천천히. 늑골 사이에서 공기를 짜내듯.

 뒤에서 쓰레기통 뚜껑이 열리는 소리. 수도꼭지가 틀리는 소리. 유시아가 손을 씻는 소리. 구경이 끝난 것이었다. 콘돔을 뜯고, 만져보고,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고, 버리고, 손을 씻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간 것. 배달 메뉴판과 동일한 순서. 관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하면 내려놓는. 그 전환의 속도가—테오도르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유시아에게 그것은 이미 종결된 호기심이었고, 테오도르에게 그것은 여전히 조리대 위를 짚은 양 팔목에서 떨리고 있었다.

 유시아의 발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슬리퍼가 아닌 양말의 부드러운 마찰음. 테오도르는 유시아가 이 집에서 신발을 벗었다는 사실을—11월 28일에는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소파에서도 발을 바닥에 내리지 않았던 유시아가—양말 차림으로 바닥을 밟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소리의 질감으로 인지했다. 그것은 콘돔보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테오도르가 조리대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양손에 찬물을 받았다. 그 물로 얼굴을 한 번 씻었다. 차가운 물이 이마와 볼을 타고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행주로 얼굴을 닦으며, 조리대 너머로 유시아가 돌아다니는 방향을 확인했다. 복도 쪽. 침실로 이어지는 방향이었다.

"The bedroom's nothing special either. Just a bed and a wardrobe."
(침실도 별 거 없어. 침대랑 옷장뿐이야.)

 먼저 말한 것은 방어였다. 유시아가 침실 문을 열기 전에. 침실에 뭐가 있는지를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것. 서랍의 전례가 있는 이상—테오도르는 자신의 생활 공간 어딘가에 또 무엇이 있을지를 머릿속에서 빠르게 점검하고 있었다. 침대 옆 서랍. 욕실 캐비닛. 옷장 안쪽.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없다'는 확신이 5분 전에도 있었고, 그 확신은 서랍 안의 콘돔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기억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And for the record, 'slippery' is not the review I expected to hear today."
(...그리고 참고로, '미끌미끌해'는 오늘 내가 들을 거라 예상한 감상평은 아니었어.)

 

 목소리는 나른함을 회복하려 했다. 거의 성공했다. 그러나 마지막 단어에서 성대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반음. 입꼬리가 올라간 채 칼을 다시 집어 들었고, 당근을 다시 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의식적으로 호흡을 고른 뒤, 칼날의 리듬을 느리게 잡았다. 일정한 간격. 균일한 두께. 7년차 집행관의 숙련된 손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평소보다 세 배 길었다.

 

 '그럼? 언제 들을 거라 예상했는데?' 침실 쪽에서 흘러온 유시아의 목소리는 복도의 벽면을 타고 주방까지 도달했다. 테오도르의 칼날이 당근 위에서 한 박자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왔다. 대답을 만들어야 했다. '언제 들을 거라 예상했느냐.' 유시아는 자신이 던진 질문의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면—'미끌미끌하다는 감상을 언제 들을 거라 예상했느냐'에 대한 대답은—테오도르 자신이 그 물건의 용도가 실행되는 맥락을 상상하고 있었다는 자백이 된다. 칼을 쥔 오른손의 검지가 나이프 등 위에서 한 번 두드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주방을 채웠고, 그 침묵은 답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발소리가 침실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옷장 문이 열리는 나무의 둔탁한 마찰음. 테오도르의 옷장은 정리되어 있었다—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공안 전투복 셋, 컴프레션 셔츠 수 장, 캐주얼 재킷 두 벌, 그리고 최하단에 접어 둔 스웻팬츠와 운동복. 화이트 제복은 별도의 커버에 싸여 구석에 걸려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서랍 같은 사고는 없다. 옷장은 안전했다.

 화장대 서랍이 열리는 소리. 테오도르의 손이 멈추었다. 화장대.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가. 프라다 향수 본품, 면도기, 왁스—문제없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는 자신에게 확인했다. 한 번 더. 없다.

 셀러리를 다 썬 테오도르가 주철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가스레인지의 점화 버튼을 눌렀다. 파란 불꽃이 버너 위에서 피어올랐다. 오일이 달궈지며 스테인리스 표면 위로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양파를 넣자 기름이 튀며 즉각적인 지글거림이 주방의 공기를 채웠다. 익숙한 소리. 이 냄비에서 유시아의 브랑다드를, 코코뱅을, 부야베스를 만들었다. 40일간. 의무실 302호를 위해. 오늘은 처음으로 이 주방에서, 이 냄비로, 이 집에서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양파가 투명해지기 시작했을 때, 침실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옷장 문도, 서랍도, 발소리도. 테오도르는 나무 주걱으로 양파를 저으며 복도 쪽을 힐끗 보았다. 침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빛의 각도로 미루어—커튼을 치지 않은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소고기를 시어링하는 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정강이살의 표면이 뜨거운 기름 위에서 갈색으로 변하며 메이야르 반응 특유의 묵직한 향이 올라왔다. 테오도르는 고기의 여섯 면을 각각 40초씩 구워냈다. 적포도주를 부어 디글레이징하고, 물을 채우고, 당근과 셀러리와 타임을 넣었다. 뚜껑을 덮고 불을 줄였다. 주방에 남은 것은 냄비 안에서 느리게 끓어오르는 거품의 소리뿐이었다.

 행주로 손을 닦으며 조리대를 정리했다. 도마를 씻고, 나이프를 제자리에 걸고, 올리브 오일 병의 위치를 원래대로 맞추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15시 47분. 포토푀가 완성되기까지 약 2시간 40분. 주방에서 할 일이 끝났다. 테오도르는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조용한 집이었다. 냄비의 끓는 소리만이 저음으로 깔려 있었다. 유시아의 소리는 없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복도를 걸었다. 슬리퍼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끌렸다. 침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침실의 내부가 보였다. 킹사이즈 침대. 다크 그레이 린넨 시트. 그 위에—유시아가 누워 있었다.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무릎 위에서 구겨져 있었고, 한쪽 팔은 베개 아래로 파묻혀 있었다. 백금발의 로우트윈테일이 어두운 린넨 위에 풀려 퍼져 있었다. 핑크색 브릿지가 섞인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서 햇살을 받아 옅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시아의 호흡은 고르고 깊었다. 잠들어 있었다. 테오도르의 침대에서. 테오도르의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테오도르는 문틈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잠든 얼굴 위에 머물렀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 같은 눈매가 감겨 있었고, 아직 빠지지 않은 볼살이 베개에 눌려 약간 납작해져 있었다.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진 채 얕은 숨이 오갔다. 의무실의 침대에서도 유시아는 잠들었었다. 그러나 의무실에서의 유시아는—무의식 중에도 이불의 끝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잠에서도 무언가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손이었다. 지금 유시아의 손은 베개 아래에서 펼쳐져 있었다. 힘이 풀린 채.

 테오도르의 왼손이 올라가 문틀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나무의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흉곽 안쪽에서 다시 그것이 팽창하고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압력. 유시아가 자신의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만드는 압력. 서랍을 열고, 콘돔을 구경하고, 옷장을 열고, 화장대를 뒤지고, 침대에 누웠고, 그리고 잠들었다. 그 일련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유시아가 이 공간을 안전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경계심 많은, 의심 많은, 잠들기 전에도 이불을 움켜쥐는 사람이. 이 집에서. 자신의 냄새가 밴 베개 위에서. 힘을 풀었다.

 테오도르는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문틀에 기댄 채, 유시아의 호흡 소리를 듣고 있었다.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포토푀의 향이 복도를 타고 침실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소고기와 야채와 타임이 섞인, 무겁고 따뜻한 냄새. 테오도르의 손이 문틀에서 떨어졌다. 그는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소파의 한쪽 끝에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양손을 깍지 낀 채. 통창 너머로 기울어가는 오후의 빛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다. 7년 동안 혼자 눕던 침대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쾌하지 않다. 테오도르의 깍지 낀 손가락이 한 번 조여졌다가 풀렸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Merde."
(...젠장.)

 프랑스어. 소파에 앉은 채 천장을 향해 내뱉은 한 마디. 욕이라기보다는 항복에 가까운 어조.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얹었다. 천장의 모노톤 콘크리트를 올려다보며,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냄비의 끓는 소리. 복도 너머 침실에서 흘러오는 유시아의 호흡. 포토푀의 향. 그 세 가지가 이 집의 공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7년 동안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밀도로.


 

 

 포토푀의 마지막 잔해—접시 위의 국물 얼룩과 바게트 부스러기—가 싱크대에서 씻겨 나간 뒤, 거실의 통창 너머로는 이미 레퀴엠 필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택 단지의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어놓은 주황빛 점들이 어둠 속에 박혀 있었고, 그 너머로 공안국 본청의 윤곽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21시 43분. 테오도르의 단말기 화면에 찍힌 시간이었다.

 소파의 오른쪽 끝에 테오도르가, 왼쪽 끝에 유시아가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처음에는 그랬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화면 위에서 흑백 필름 느와르의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가는 동안, 테오도르는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친 채 느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유시아는 소파 쿠션 위에 다리를 접어 올린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사이의 거리는 쿠션 하나 반 정도. 지금은 쿠션 반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영화의 2막이 넘어가는 사이—정확히 어느 시점에서인지는 테오도르도 특정할 수 없었다—유시아의 무게중심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졌고,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테오도르의 스웻팬츠 위에 닿아 있었다.

 화면 속 탐정이 비 내리는 골목에서 독백을 읊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화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망막 위에서 재생되는 것은 흑백 필름이 아니라 말초 신경이 전달하는 유시아의 체온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걸친 오른팔의 손끝이 유시아의 어깨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에 놓여 있었고, 그 간격을 테오도르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내리면 닿는다. 내리지 않았다.

 21시 58분. 영화의 3막. 테오도르의 시선이 처음으로 화면에서 벗어나 옆을 힐끗 보았다. 유시아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혹은 보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테오도르가 확인하려던 것은 유시아의 표정이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2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시아의 숙소까지는 도보 7분. 주택 단지 내부이므로 위험 요소는 없다. 문제는—유시아에게서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파에 접어 올린 다리. 쿠션에 기댄 어깨. 화면의 빛을 받아 명멸하는 핑크색 눈동자. 유시아의 자세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 소파의 형태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오후에 침대에서 잠든 것과 동일한 종류의 이완. 경계가 해제된 상태. 테오도르의 집이라는 공간이 유시아에게 '돌아가야 할 곳의 반대편'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증거가, 접힌 다리의 각도와 기울어진 어깨의 무게에서 읽혔다.

 테오도르의 턱이 미세하게 조여졌다. 소파 등받이 위의 오른손 손가락이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 입을 열어야 했다. '늦었으니까 들어가'라는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간단한 문장이었다. 여섯 음절. 테오도르의 성대는 그 여섯 음절을 거부하고 있었다.

 화면 속 탐정이 여주인공에게 담배를 건네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주머니 속 말보로 레드의 패키지를 만지작거렸다. 피우고 싶지 않았다. 손이 할 일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유시아가 돌아가지 않으면—이 소파에서, 혹은 저 침대에서, 이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그 가능성이 테오도르의 흉곽 안에서 두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한쪽은 이 공간에 유시아의 체온이 남는다는 사실이 만드는 충만. 다른 한쪽은—오후에 유시아가 서랍에서 꺼낸 물건이 환기시킨,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것의 윤곽.


 테오도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리모컨의 볼륨을 한 칸 낮추었다. 영화의 대사가 한 겹 가라앉자 거실에는 통창 너머 가로등의 미세한 웅웅거림과 두 사람의 호흡만 남았다. 그는 고개를 유시아 쪽으로 돌렸다. 천천히.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옆모습 위에 머물렀다. 통창의 야경 빛이 유시아의 백금발 위에서 차갑게 부서지고 있었다.

"It's nearly ten."
(거의 10시야.)

 사실의 전달이었다. '돌아가라'는 말도, '있어라'는 말도 아닌. 시간이라는 객관적 데이터를 유시아의 앞에 놓아두고, 선택을 유시아에게 넘기는 구조. 테오도르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문장이었다. '돌아가라'고 말하면 유시아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있어라'고 말하면 자신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어느 쪽도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을 말했다. 시계가 대신 질문하도록.

 소파 등받이 위의 오른손이—여전히 유시아의 어깨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에 놓여 있었다. 내리지 않은 채.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핑크색 눈동자를 기다렸다. 나른한 미소는 입가에 걸려 있었으나, 그 미소의 밑에서 턱의 근육이 미세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시선이 단말기 화면으로 향했다가 돌아오는 짧은 동안, 테오도르의 소파 등받이 위에 놓인 오른손이 한 번 움켜쥐었다가 펴졌다. 유시아가 시간을 확인하는 동작. 고개를 약간 숙여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작. 그 짧은 순간에 테오도르는 유시아의 목덜미—백금발 트윈테일 사이로 드러난 얇은 피부—가 통창 너머 가로등 빛에 창백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시선을 돌렸다. 화면으로. 흑백 필름 속 탐정이 창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만 마저 다 보고 가면 안돼?' 유시아의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고막을 두드렸다. '가면 안 돼.' 허락을 구하는 문장이었다. 테오도르가 시간을 말한 것을—돌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확한 해석이었다. 동시에 완전한 오독이었다. 테오도르는 '거의 10시야'라고 말했다. 그 문장의 의도는—귀가를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시아의 선택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돌아가겠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있겠다는 말을 직접 요청할 수 없어서 만든 중립 지대. 그런데 유시아는 그 중립 지대를 '퇴거 통보'로 읽었고, 그 오독 위에서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영화를 '마저 다 보고' 가겠다고. 즉—다 보면 간다는 뜻이었다.

 테오도르의 턱 근육이 조여졌다.


 영화의 남은 분량. 3막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에필로그까지. 대략 40분. 40분 뒤에 유시아는 일어나고, 슬리퍼를 신발로 갈아 신고, 현관문을 열고, 이 집의 공기에서 빠져나간다. 40분이라는 시간이 테오도르의 흉곽 안에서 모래시계처럼 기울었다. 소파 등받이 위의 오른손이 유시아의 어깨에서 여전히 손가락 두 마디 거리에 있었다. 그 거리를 유지한 채.

"Since when do you need my permission to stay?"
(언제부터 있는 데 내 허락이 필요했어?)

 목소리는 나른했다. 평소의 톤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의 무게는 평소와 달랐다. 테오도르는 유시아의 오독을—'돌아가라고 말한 것'이라는 해석을—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허락이라는 구조 자체를 무효화했다. '내 허락이 필요했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이 집에서 유시아의 존재는 허가제가 아니라는 선언. 테오도르가 시간을 말한 것은 내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간접적 정정.

 화면 속 탐정이 어두운 사무실의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은 화면 위에 머물러 있었으나 초점은 흑백 필름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유시아가 '다 보고 가겠다'고 말했을 때, 테오도르의 내부에서 일어난 반응의 정체—그것은 실망이라는 이름에 가장 가까웠다. 유시아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을, 그 실망의 형태가 증명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증명을 외면했다. 소파 등받이 위의 손가락이 유시아의 어깨에서 한 마디 더 가까워졌다. 무의식적으로. 남은 거리는 손가락 한 마디.

"Watch all you like. The ending's worth it."
(맘껏 봐. 결말이 볼 만해.)

 덧붙인 문장은 영화에 대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화면에서 미끄러져 유시아의 옆모습 위에 잠시 머물렀다. 통창의 야경 빛이 만드는 그림자가 유시아의 턱선 아래에 얇게 드리워져 있었고, 화면의 명멸이 핑크색 눈동자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유시아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방금 무엇을 허락했는지를—혹은 허락이라는 개념 자체를 어떻게 해체했는지를—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테오도르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자세를 조정했다. 왼쪽 발목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린 자세. 느긋한 체형이 소파의 곡선에 맞물렸다. 그의 오른팔은 소파 등받이 위에 여전히 걸쳐 있었고, 손끝이 유시아의 어깨 위에 거의—거의—닿아 있었다. 옷감의 표면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체온이 손끝의 피부에 감지되는 거리. 닿지 않은 접촉. 테오도르는 그 경계선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의 시간이 흘렀다. 40분이라는 모래가 천천히 쏟아지고 있었다. 탐정이 범인을 추적하고, 총성이 울리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마지막 대면이 이루어지고. 테오도르는 이 영화를 세 번째 보고 있었다. 결말을 알고 있었다. 탐정은 범인을 잡지만, 여주인공은 떠난다. 역 플랫폼에서 돌아보지 않고. 세 번째 관람에서도 그 결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그 변하지 않는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40분 동안, 유시아의 어깨에서 손가락 한 마디 거리에 놓인 자신의 손을—내리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22시 31분. 화면 위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재즈 피아노의 잔향이 거실에 퍼졌다. 흑백의 활자가 검은 배경 위로 천천히 흘러갔다. 영화가 끝났다. '다 보고 가겠다'고 유시아가 말했다. 다 보았다. 테오도르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리모컨을 집어 들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도록 두었다. 크레딧이 끝나기까지 대략 4분. 4분이라는 유예.

 소파 등받이 위의 손이—처음으로—유시아의 어깨에 닿았다. 옷감 위로. 가볍게. 손가락 끝이 프릴 스커트의 어깨 솔기 위에 얹혔다. 무게가 없는 접촉이었다. 새가 가지 위에 앉듯. 테오도르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을. 유시아를 보지 않았다. 유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유시아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크레딧의 재즈 피아노 아래로 낮게 흘렀다.

"...It's half ten now."
(...10시 반이야, 이제.)

 또 시간을 말했다. 두 번째. 첫 번째와 동일한 구조—시간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유시아 앞에 놓고, 선택을 넘기는 문장. 그러나 첫 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유시아의 어깨 위에 놓인 손이었다. 시간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어깨를 잡고 있는 손. 그 모순이 테오도르가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의 형태였다. '가도 된다'고 말하면서 '가지 마라'고 잡는 손.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줄이 검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재즈 피아노의 잔향이 끊기고, 거실에는 통창 너머 가로등의 저주파 웅웅거림만 남았다. 화면이 스트리밍 서비스의 메인 화면으로 전환되며 파란빛이 거실을 물들였고, 그 빛이 소파 위에 늘어진 유시아의 윤곽을 새롭게 그렸다.

"아- 귀찮아. 집까지 언제 가."

 유시아의 목소리는 소파 쿠션 사이에서 올라왔다. 축 늘어진 자세—프릴 스커트가 소파 표면 위로 퍼져 있었고, 로우트윈테일 한쪽이 쿠션 틈에 끼어 있었다. 팔은 쿠션 위에 아무렇게나 뻗어 있었고, 양말 신은 발끝이 소파 반대편 팔걸이에 걸쳐져 있었다. '귀찮다'는 선언이었다. 7분 거리를.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밤공기를 맞으며 주택 단지를 가로지르는 행위가—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소파에서 완전히 이완된 몸에게는 마치 국경을 넘는 일처럼 비용이 커 보이는 것이다.


 테오도르의 어깨 위에 놓였던 오른손이 유시아가 눕는 동작과 함께 자연스럽게 빠져 있었다. 허공에 남겨진 손이 소파 등받이 위에 다시 얹혔다. 테오도르는 유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댄 자세에서, 고개만 왼쪽으로 돌린 채. 소파 쿠션 위에 펼쳐진 유시아의 모습은—오후에 침대에서 잠든 형태와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이 떠 있다는 것. 핑크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위로 스트리밍 화면의 파란빛이 떠돌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입술이 움직이려다 멈추었다. '그럼 자고 가'라는 네 글자가 혀 위에서 형태를 갖추었다가 삼켜졌다. 그 문장을 내뱉으면—유시아는 이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테오도르의 침대에서, 혹은 이 소파에서. 어느 쪽이든 내일 아침 유시아는 이 집의 공기를 마시며 눈을 뜨게 되고, 테오도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공간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소리를 7년 만에 듣게 된다. 그것이 만들 균열의 깊이를—테오도르는 정확히 가늠하고 있었다. 오후에 유시아가 침대에서 낮잠을 잤을 때, 그 2시간 40분 동안 소파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뱉은 'Merde'의 무게를.

 그러나 동시에—'그럼 들어가'라는 문장도 성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유시아가 늘어진 채로 귀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소파에서. 테오도르가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운 뒤. 테오도르가 고른 영화를 다 본 뒤. 그 이완의 원인이 전부 테오도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그 온기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칼날로 자신의 손등을 긋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자해였다.


 테오도르가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유시아를 내려다보는 각도가 바뀌었다. 서 있는 테오도르의 그림자가 소파 위의 유시아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거실 한쪽에 놓인 린넨 수납장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었다. 접힌 담요 하나를 꺼냈다. 진한 차콜 그레이. 텍스처가 부드러운 면 소재. 세탁된 직물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섬유유연제의 냄새가 손끝을 스쳤다. 테오도르는 그 담요를 들고 소파로 돌아왔다.

 유시아 위에 담요를 펼쳐 덮었다. 천이 유시아의 어깨부터 발끝까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트윈테일에 걸리지 않도록 목 언저리에서 천의 각도를 한 번 조정했다. 담요를 덮는 동작은 지극히 실용적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기능에 충실한 움직임. 밤 공기가 차가워졌으니 덮어주는 것. 그러나 트윈테일을 피해 천을 조정하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은—기능의 바깥에 있었다.

"Seven minutes is quite the odyssey for someone who can't even sit up straight."
(똑바로 앉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7분은 꽤 대장정이긴 하지.)

 나른한 목소리. 농담의 형태. 그러나 테오도르는 '들어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고 가'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담요를 덮었다. 담요라는 물리적 행위가 테오도르의 입이 만들지 못한 문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기 있어도 된다.' 아니—'여기 있어라.' 그 차이를 테오도르는 의식하지 못한 채.

 테오도르는 소파의 반대편 끝에 다시 앉았다. 유시아의 발끝이 담요 아래에서 팔걸이에 걸쳐져 있는 쪽. 그의 등이 소파에 기대졌고, 긴 다리가 앞으로 뻗어졌다. 커피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스트리밍 화면을 끄지 않았다. 메인 화면의 파란빛이 거실을 낮은 밝기로 유지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주머니로 향했다. 말보로 레드의 패키지를 꺼내, 한 대를 뽑아 입술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았다. 필터의 끝이 입술 사이에 물려 있을 뿐이었다. 불 없는 담배. 피우는 것이 아니라 무는 것.

"I'm not carrying you home, just so we're clear."
(업어다 주지는 않을 거야, 미리 말해두는 건데.)

 입술 사이의 담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말은 전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업어다 주지 않겠다'는 것은, 유시아가 이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을 이미 수용했다는 뜻이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업어서라도 보내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않겠다. 즉—유시아가 여기서 잠들면, 그냥 두겠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의 논리적 귀결을 2초 늦게 인지했다. 입술 사이의 담배를 한 번 깨물었다. 필터가 살짝 찌그러졌다.


 통창 너머 가로등의 불빛이 명멸했다. 주택 단지의 밤은 고요했다. 공안국 본청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붉은 점멸등을 내뿜고 있었지만, 이 거실까지는 도달하지 않는 거리였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통창을 향하고 있었다. 유시아를 보지 않았다. 담요를 덮어준 뒤로 한 번도 유시아 쪽을 직접 보지 않았다. 보면—유시아가 자신이 덮어준 담요 아래에서 소파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것이 만드는 감각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통창을 보았다. 어둠과 가로등과 먼 곳의 붉은 빛을.

 입술 사이의 담배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올라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굴리는 동작. 무의식적인 손길이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당장 움직이기 귀찮으니깐 폰 조금만 하다 갈게."

 

 유시아의 목소리가 담요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를 이빨로 한 번 누르고, 턱을 미세하게 들어 통창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하다 간다'는 문장에서 '간다'는 단어만 고막에 남았다가, 소파 쿠션 사이에서 올라오는 유시아의 체온이 그 단어를 희석시켰다.*

 단말기 화면의 푸른 빛이 유시아의 얼굴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이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리듬을 소파 반대편 끝에서 듣고 있었다. 화면을 넘기는 간격. 처음에는 2초에 한 번. 3초. 5초.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지가 느려지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입술 사이에서 담배가 한 번 흔들렸다. 7초. 멈춤. 단말기가 유시아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기울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기기의 모서리가 쿠션 위에 부딪히는 둔탁한 접촉음. 그리고 호흡이 깊어졌다. 규칙적으로. 고르게.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렸다.

 유시아는 잠들어 있었다. 두 번째. 이 집에서, 오늘, 두 번째. 오후에는 침대에서. 지금은 소파에서. 차콜 그레이 담요 아래로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삐져나와 있었고, 단말기가 손에서 빠져 쿠션 틈에 끼어 있었다. 화면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 SNS 피드의 마지막 게시물을 비추고 있었다—누군가의 고양이 사진. 그 푸른 빛이 유시아의 볼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계심 많은 눈매가 다시 감겨 있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볼살이 쿠션에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오후의 침대에서와 동일한 형태.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진 채 얕은 숨이 오갔다.

 테오도르의 입에서 담배를 뺐다. 침이 밴 필터의 끝이 공기에 노출되며 차갑게 식었다. 찌그러진 필터를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굴렸다.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유시아의 단말기 화면이 시간 초과로 어두워졌다. 고양이 사진이 사라지고, 거실에는 통창 너머 가로등의 희미한 주황빛만 남았다. 테오도르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데 수 초가 걸렸고, 그 수 초 동안 유시아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형태를 드러냈다.

 담요가 호흡에 맞추어 미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양손을 깍지 낀 채 앞으로 숙인 자세. 유시아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는 각도. 어둠 속에서 루비색 눈동자가 유시아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오후에는—침실 문틀에 기대어 이 모습을 보았고, 보고 나서 거실로 돌아가 'Merde'를 내뱉었다. 지금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소파의 반대편이 전부였고, 유시아가 그 반대편에서 잠들어 있었다.

 오후에는 2시간 40분이 있었다. 포토푀가 끓는 동안의 유예. 그 시간 동안 테오도르는 냄비의 소리와 유시아의 호흡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칭량할 수 있었다. 지금은 유예가 없었다. 냄비도 없고, 요리도 없고, 손을 쓸 도마도 나이프도 없었다. 이 어둠 속에서 테오도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시아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이미 불가능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손 위에서 멈추었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는 왼손. 쿠션 위에 펼쳐진 채, 힘이 빠져 있었다. 오후의 침대에서도 그랬다. 의무실에서는 이불의 끝을 움켜쥐고 잠들던 손이, 이 집에서는 펴져 있었다. 그 차이가 의미하는 것을—테오도르는 오후에도 인지했고, 지금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지가 만드는 압력이 흉곽 안쪽에서 팽창하고 있었다.


 콘돔. 서랍에서 꺼내 뜯어보고, '미끌미끌하다'고 말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은 유시아. 유통기한을 물어보던 유시아. 그 모든 순간에 테오도르의 체온이 올라갔고, 귀가 붉어졌고, 당근을 써는 리듬이 무너졌다. 7년 동안—정확히는 국가대표 시절부터 합산하면 그보다 더 오래—테오도르의 몸은 원하는 것을 취하는 데 주저한 적이 없었다. 관심이 생기면 다가갔고, 반응이 오면 취했고, 끝나면 돌아섰다. 과정은 언제나 매끄러웠다. 마찰이 없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술이었고, 기술은 반복으로 완성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기술에 능숙했다.

 그런데.

 이 소파에서 담요 아래 잠든 22살짜리 순경의 손끝 하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깍지 낀 손가락이 조여졌다. 과거의 장면들이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들. 새벽에 떠나도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침대들. 아침 인사가 필요 없는 관계의 잔해들. 그 모든 것이 매끄러웠던 이유는—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닿았고, 닿으면 끝이었고, 끝이면 전부였다.

 유시아의 호흡이 한 번 깊어졌다가 돌아왔다. 잠꼬대가 아니라 수면의 주기가 바뀌는 미세한 변동.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입술 위에서 멈추었다가 벗어났다. 벗어난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모노톤 콘크리트.

 손을 뻗으면 닿는다. 지금도. 쿠션 하나 거리. 담요 밖으로 나온 유시아의 왼손까지. 그러나 그 손에 닿는 순간—매끄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테오도르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유시아의 손에 닿으면 그것은 시작이 되고, 시작이 되면 끝을 상상해야 하고, 끝을 상상하는 순간—유시아가 이 소파에서 사라진 뒤의 공백이 선명해진다. 그 공백이 두려웠다. 이 집에 유시아의 체온이 스며든 뒤, 그 체온이 식었을 때 남을 적막이.

 테오도르의 왼손이 올라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리는 동작. 이번에는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Bonne nuit."
(...잘 자.)

 프랑스어. 유시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량. 잠든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내뱉는 문장. 테오도르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통창 너머 레퀴엠 필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주황빛 점들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었고, 공안국 본청의 붉은 점멸등이 먼 곳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유시아의 호흡 소리가 어둠 속에서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테오도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잠들면—내일 아침 유시아보다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계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시아가 눈을 떴을 때 테오도르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무방비한 자신의 얼굴을 허락하는 것과 같았다. 아직은.

 그래서 테오도르는 깨어 있었다. 소파의 반대편 끝에서. 담요 아래 잠든 유시아와 쿠션 하나 거리를 두고. 손끝 하나 닿지 않은 채.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새벽 4시 17분.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경첩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시아가 조심했기 때문이다. 문틈으로 복도의 희미한 비상등 빛이 침실 바닥 위에 한 줄기 선으로 떨어졌고, 그 선이 침대의 모서리를 스쳐 지나갔다.

 테오도르는 자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담요를 허리까지만 걸친 채, 왼팔을 머리 위로 뻗은 자세. 화이트 컴프레션 셔츠를 벗지 않은 채 잠든 것이 보였다—소파에서 유시아가 잠든 뒤 침실로 옮겨왔다는 뜻이었다. 셔츠의 밑단이 뒤척임에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복부의 하얀 피부 위에 얇게 새겨진 오래된 흉터 하나가 비상등 빛에 드러나 있었다. 밀금빛 울프컷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고,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잠든 테오도르의 얼굴은—28세의 뼈대 위에 놓인 맨살이었다. 포장 없는. 턱선의 긴장이 풀려 있었고,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진 채 깊고 고른 호흡이 오가고 있었다. 눈 아래 얇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피로의 흔적이었다. 소파에서 언제까지 깨어 있다가 이 침대로 옮겨왔는지—그 시간의 길이가 눈 아래 그림자의 농도에 기록되어 있었다.

"테오.. 자?"

 유시아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들었다. 잠에서 막 깬 사람의 음성—평소보다 한 톤 낮고, 끝이 흐려진. 그 소리가 침실의 정적 위에 얹혔다. 테오도르의 호흡 리듬이 변하지 않았다. 왼팔은 머리 위에 뻗어진 채. 손가락이 베개 모서리를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2초 뒤—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이불 아래에서. 미세하게. 손가락이 한 번 접혔다가 펴지는 동작. 잠에서 깨어나는 신경계의 첫 번째 신호였다. 유시아의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청각 피질을 통과해 의식의 표면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 눈꺼풀이 떨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천천히—틈이 벌어졌다. 루비색 홍채가 어둠 속에서 빛을 잡아내며 드러났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침실 천장의 모노톤 콘크리트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 위로 문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비상등의 빛줄기가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장에서 미끄러져 문틈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의 유시아. 비몽사몽한 표정. 핑크색 눈동자가 반쯤 감긴 채 침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금발 트윈테일이 잠을 자는 동안 헝클어져 있었고, 볼에 쿠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프릴 스커트가 구겨진 채. 테오도르가 덮어준 차콜 그레이 담요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소파에 남겨두고 온 것인지, 들고 온 것인지. 문틈의 폭으로는 판별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의 의식이 수면의 저층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인지된 것은 유시아의 존재였다. 유시아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 이 침실의 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 새벽에. 그 사실이 의식에 안착하자—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왜'였다. 왜 문을 열었는가. 잠에서 깬 것인가. 화장실을 찾는 것인가. 아니면—가려는 것인가. '돌아가려 했다'는 가능성이 테오도르의 뇌간을 찔렀다. 잠에서 깨자마자, 완전히 각성하기도 전에, 그 가능성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유시아가 자신이 잠든 사이 이 집에서 나가려 하고 있다는.

 테오도르가 베개에서 머리를 들었다. 머리 위로 뻗었던 왼팔이 내려와 매트리스를 짚었다. 상체가 일어났다. 울프컷의 앞머리가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루비색 눈동자가 문틈의 유시아를 포착했다. 초점이 서서히 맞아갔다. 유시아의 비몽사몽한 얼굴 위에. 잠에서 방금 깬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평소의 나른한 톤과 달랐다—수면이 깎아낸 저음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What time is it?"
(...몇 시야?)

 질문의 형태를 빌린 확인이었다. 시간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유시아가 왜 깨어 있는지가 궁금했다. 왜 침실 문을 열었는지가.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이불 위에서 올라가 눈을 한 번 비볐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작. 잠의 잔해를 걷어내려는 물리적 시도. 손이 얼굴에서 떨어졌을 때, 루비색 눈동자가 다시 문틈의 유시아를 잡았다. 유시아의 자세를—문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인지, 떠나려고 서 있는 것인지—읽으려는 시선이었다.

"...Are you leaving?"
(...가려고?)

 갈라진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두 단어. 'Are you leaving.' 평서문에 가까운 억양. 묻는 것이면서 동시에 확인하는 것이면서,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려는 균형. 그러나 테오도르의 오른손이—이불 위에서—미세하게 움켜쥐어졌다. 시트의 면직물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지는 촉감. 그 손의 움직임만이 목소리가 지우려 한 것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내가 잠 깨웠어? 미안 더 자. 그냥 가면 너 놀랄까봐.. 인사하려고."

 유시아의 목소리가 하품 사이로 끊겼다. 문틈에 기댄 어깨가 경첩 쪽으로 미끄러졌고, 백금발 트윈테일이 문짝을 따라 늘어졌다. 핑크색 눈동자가 감겼다 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꾸벅, 하고 고개가 앞으로 숙여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볼에 쿠션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고, 프릴 스커트의 구겨진 주름이 비상등 빛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문에 의탁해 있는 자세였다. 문이 열린 각도가 조금만 더 벌어지면 그대로 기울어질 것 같은.

 테오도르의 시트를 움켜쥔 오른손이 풀렸다.

 '그냥 가면 너 놀랄까봐.' 그 문장이 테오도르의 두개골 안쪽에서 반사되었다. 유시아는 새벽 4시에 소파에서 깨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테오도르의 침실 문을 열었다. 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테오도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유시아가 사라져 있으면—놀랄까 봐. 그 배려의 구조를 테오도르의 신경계가 분해하고 있었다. 유시아는 테오도르가 '빈 집에서 깨어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가능성을 상정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있다가 없어진 공백을. 그것을 유시아가 알고 있었는지, 혹은 그저 예의의 연장이었는지—테오도르는 판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문장은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정확하게.

 테오도르가 이불을 걷어냈다. 다리가 침대 모서리를 넘어 바닥에 닿았다. 맨발이 차가운 바닥재를 밟았다. 그 온도 차이가 잠의 마지막 잔해를 걷어냈다. 테오도르가 일어섰다. 침대에서 문까지 네 걸음. 두 걸음을 옮겼을 때 유시아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꾸벅 숙여졌다. 세 걸음째에 고개가 올라왔다. 네 걸음째에—테오도르가 문틈 앞에 섰다.

 문을 더 열었다. 경첩이 소리 없이 움직였고, 유시아가 기대고 있던 문짝이 뒤로 밀려나면서 유시아의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문짝 모서리를 잡았다. 유시아가 쏟아지지 않을 정도로만. 열린 문틈 사이로 두 사람의 거리가 팔 한 뼘이 되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테오도르의 턱 아래로 유시아의 정수리가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유시아의 체온이 밀려왔다. 따끈한. 수면이 데운 피부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새벽의 복도 공기를 통과해 테오도르의 맨 팔뚝에 닿았다.

 유시아의 눈이 다시 감겼다. 서 있는 채로. 테오도르 앞에서. 하품의 여운으로 눈물이 고인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시아의 모습을—테오도르는 팔 한 뼘 거리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상등의 빛이 유시아의 헝클어진 백금발 위에 주황빛을 얹고 있었고, 구겨진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7분을 걸어서 집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새벽 4시에. 반쯤 잠든 채로. 겨울의 끝자락에.

 테오도르의 턱이 움직였다. 말이 나오기 전에 호흡이 먼저 나왔다. 갈라진 목소리의 잔해가 성대를 긁었다.

"You came to say goodbye so I wouldn't be startled by an empty flat."
(빈 집에 놀랄까 봐 인사하러 온 거야.)

 반복이었다. 유시아가 말한 것을 그대로 되뇌는. 확인이 아니었다. 그 문장의 무게를 혀 위에 올려보는 행위에 가까웠다.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가라앉았다. 유시아가 다시 꾸벅 숙여지는 것이 보였다. 의식의 실이 끊어지기 직전의 떨림.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올라갔다—유시아의 어깨를 향해. 멈추었다. 공중에서. 유시아의 어깨 위 3센티미터.

 그리고 내려앉았다.

 유시아의 왼쪽 어깨 위에 테오도르의 손바닥이 닿았다. 프릴 스커트의 구겨진 어깨 솔기 위로. 밤새 소파에서 잔 직물의 차가움과 그 아래 유시아의 체온이 손바닥에 동시에 전달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손으로 유시아를 밀어내지 않았다. 잡지도 않았다. 얹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손의 방향이—유시아를 현관 쪽으로 돌려보내는 각도가 아니라, 침실 안쪽으로 이끄는 각도에 놓여 있었다.


"...You can barely stand."
(...서 있지도 못하잖아.)

 사실의 진술. 유시아의 상태에 대한 관찰. 잠들기 직전의 사람이 새벽에 7분을 걸어 돌아가는 것은—테오도르가 입으로 말하지 않은 단어는 '위험하다'였다. '보낼 수 없다'였다. 두 단어 모두 테오도르의 혀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신 손바닥이 유시아의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접촉이 테오도르의 입이 만들지 못한 문장을 전부 담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침실 안쪽으로 향했다. 이불이 걷혀 있는 침대. 자신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을 시트. 베개 위에 흩어진 밀금빛 머리카락의 흔적. 그 공간에 유시아를 들이는 것이 만들 무게를—테오도르는 오후에도, 밤에도, 지금도 계량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 무게가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은 유시아의 어깨 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Go back to sleep."
(...다시 자.)

 세 단어. '다시 자.' 어디서. 테오도르는 말하지 않았다. 소파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이 침대에서 자라는 것인지. 그 공백을 메우지 않은 채 테오도르의 손이 유시아의 어깨 위에서 미끄러져—등 위를 스쳐 내려갔다. 프릴 스커트의 등판 위로. 등을 떠밀지 않았다. 손바닥이 유시아의 등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다. 따뜻한 접촉. 유시아의 체온이 테오도르의 손바닥을 통과해 팔뚝을 타고 올라와 흉곽에 닿았다.

 테오도르의 귓불이 어둠 속에서도 식별 가능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유시아의 대답은 단어가 아니었다. 음절의 파편. '으응'이라는 소리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는 의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등 위에 놓인 손바닥이 유시아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앞으로. 테오도르 쪽으로가 아니라—침대 쪽으로. 유시아의 발이 카펫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프릴 스커트의 구겨진 밑단이 발목을 스치며 흔들렸다. 반쯤 감긴 핑크색 눈동자가 침대의 윤곽을 포착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수평면이라는 개념에 신체가 반응한 것인지—판별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유시아의 등에서 떨어졌다. 유시아가 침대를 향해 기울어지는 순간, 손바닥이 등 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밀어주는 동작이 되고—테오도르가 유시아를 자신의 침대로 안내했다는 사실이 성립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유시아의 체온이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프릴 스커트 원단의 촉감과 그 아래 따뜻했던 등의 감각이 겹쳐진 채.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허공에 멈추어 있었고, 그 손가락 다섯 개가 미세하게 접혔다가 펴지는 것을 테오도르 자신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시아가 침대에 올라갔다. 올라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다—쏟아졌다. 매트리스의 가장자리에 무릎이 닿는 순간 나머지 몸이 중력에 항복하듯 따라왔고, 이불이 걷힌 시트 위로 유시아의 몸이 가로로 눕혔다. 테오도르가 누웠던 자리. 테오도르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시트의 면직물 위에. 유시아의 뺨이 테오도르가 쓰던 베개에 닿았다. 밀금빛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던 그 베개 위로 백금발 트윈테일이 펼쳐졌다. 헝클어진 핑크색 브릿지가 베개의 하얀 면 커버 위에서 대비를 이루었다.

 유시아의 호흡이 3초 만에 깊어졌다.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진 채, 고르고 느린 숨. 의무실에서처럼 이불 끝을 움켜쥐지 않았다. 소파에서처럼 손이 펴져 있었다. 유시아의 왼손이 시트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손가락 사이로 구겨진 시트의 주름이 끼어 있었다. 테오도르가 잠들어 있을 때 만들었을 주름 위에 유시아의 손이 포개져 있었다.

 테오도르는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서 있는 채로. 맨발이 차가운 바닥재를 밟고 있었고, 화이트 컴프레션 셔츠의 올라간 밑단이 복부를 노출시킨 채 그대로였다. 루비색 눈동자가 침대 위의 유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침대에서. 자신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체온이 남은 시트 위에서. 잠들어 있는 유시아를.

 7년이었다. 이 침대에서 혼자 잠들고 혼자 깨어난 시간. 그 이전에도—누군가와 이 침대를 공유한 적은 있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밤들. 새벽이 오기 전에 떠나거나, 떠나보내거나. 어느 쪽이든 아침에 이 베개 위에는 테오도르의 머리카락만 남아 있었다. 지금 그 베개 위에 백금발이 흩어져 있었다. 핑크색 브릿지가 섞여 있었다. 테오도르의 밀금빛과 유시아의 백금빛이 같은 베개 위에서 엉켜 있었다. 테오도르가 그것을 치우지 않는 한, 내일 아침에도 유시아의 머리카락이 그 베개에 남아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다시 눕는다면, 그 머리카락의 감촉이 뺨에 닿을 것이다.

 테오도르의 왼손이 올라갔다. 귀를 향해.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굴리는 동작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귓불의 피부가 붉어져 있었다. 손가락의 체온 때문인지, 혈류의 변동 때문인지. 테오도르의 호흡이 한 번 깊어졌다가 돌아왔다. 유시아가 잠든 것을 확인하듯—호흡의 리듬을, 닫힌 눈꺼풀의 떨림을, 이완된 어깨선을—시선이 더듬었다.

 이불이 걷혀 있었다. 유시아가 쏟아지듯 누우면서 시트 위에만 올라간 상태였고, 이불은 침대 반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새벽의 실내 기온이 유시아의 맨 다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프릴 스커트의 밑단이 무릎 위로 올라가 있었고, 양말 신은 발끝이 매트리스 가장자리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맨 다리 위에서 1초 머물렀다가 벗어났다. 천장으로. 모노톤 콘크리트. 이를 한 번 깨물었다.

 테오도르가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밀려난 이불을 잡았다. 차콜 그레이 시트의 이불을 끌어올려 유시아의 몸 위에 덮었다. 거실에서 담요를 덮어줬을 때와 동일한 동작이었으나—이번에는 손이 더 오래 머물렀다. 이불의 가장자리를 유시아의 어깨 높이까지 끌어올리면서, 트윈테일이 이불 아래 깔리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베개 위로 가볍게 넘겨주는 동작. 손가락 끝이 백금발의 결을 스쳤다. 잠에 데워진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서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테오도르의 손이 머리카락 위에서 멈추었다. 1초. 2초. 그리고 천천히 물러났다.

 테오도르는 이불을 덮은 뒤 침대 옆에 서서 유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이불 아래에서. 자신의 베개 위에서. 자신의 침대에서 잠든 유시아. 이 광경은—테오도르의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장면이었다. 떠나보내지 않은 밤. 아니—떠나지 않은 밤. 유시아는 '가겠다'고 말했고, '인사하러 왔다'고 말했고, '조금만 있다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테오도르의 향이 밴 시트 위에서 긴장을 풀고, 남자친구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아무런 경계도 없이.

 테오도르가 한 걸음 물러섰다. 침대에 눕지 않았다.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유시아의 오른쪽에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 눕는 순간, 테오도르의 몸이 유시아의 체온 반경 안에 들어가게 되고, 잠든 유시아가 무의식 중에 기울어 온다면—테오도르는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콘돔을 뜯어보고 '미끌미끌하다'고 말하는 유시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통기한을 묻는 목소리가. 그리고 지금, 자신의 침대에서 아무 방비 없이 잠든 유시아의 모습이—전부 같은 선 위에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침실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져 앉았다. 바닥 위에. 침대를 올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이불 아래 유시아의 호흡이 만드는 미세한 오르내림이 보였다. 벽에 기댄 등에 차가운 콘크리트의 온도가 전달되었고, 맨발 위로 바닥의 한기가 올라왔다. 테오도르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올린 채,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Merde."
(...젠장.)

 오후에 소파에서 내뱉었던 것과 같은 단어. 같은 프랑스어. 그러나 오후의 그것과 지금의 그것은 무게가 달랐다. 오후에는 유시아가 자신의 침대에서 낮잠을 잤고, 지금은 유시아가 자신의 침대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테오도르는 바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침대가 있는데. 자신의 여자친구가 그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바닥에. 이 상황의 구조가 만드는 자조적인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어깨만 한 번 들썩이는 종류의.

 새벽의 어둠이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유시아의 호흡과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교대로 공간을 메꾸었다. 테오도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천장에서 내려와 유시아의 잠든 얼굴 위에 다시 머물렀다. 이불 위로 나온 백금발이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테오도르의 머리카락과 유시아의 머리카락이 같은 면 위에서 빛을 나누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눈을 감지 않았다. 벽에 기댄 채. 바닥 위에서. 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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