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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Not really my genre.

 오전의 빛이 통창을 통해 거실 바닥 위로 길게 누웠다. 레퀴엠 필드의 아침은 언제나 기묘하게 고요했으나 오늘은 그 고요함의 질감이 달랐다. 공기 중에 남아 있는 것. 어젯밤의 잔향. 시트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체취와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샤워 겔의 향이 뒤섞인 전날 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후각적 증거.

 테오도르는 주방에 서 있었다. 맨 상체에 블랙 스웻팬츠만 걸친 채. 등 위로 드러난 크고 작은 흉터들이 아침 햇살 아래에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추출 압력이 주방을 가르는 가느다란 소음을 내고 있었고, 카운터 위에는 머그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블랙, 하나는 유시아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냉장고에서 꺼낸 버터를 나이프로 얇게 밀어 토스트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 동작이 멈추었다. 복도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불규칙한 리듬. 한 발을 내딛고, 멈추고, 다시 내딛고, 벽에 손이 짚히는 소리. 테오도르의 시선이 주방 입구 쪽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 유시아가 벽에 한 손을 짚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걷는다'는 표현이 적합한지 의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골반이 제대로 축을 잡지 못하고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렸고, 허벅지 안쪽 근육이 체중을 버티지 못해 무릎이 한 박자씩 꺾였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의지로 편 뒤 다음 발에서 다시 일그러지기를 반복했다.


 테오도르의 손에서 버터 나이프가 카운터 위에 내려놓아졌다. 소리 없이. 어깨가 주방 입구 프레임에 기대졌고, 팔짱이 느슨하게 가슴 앞에서 교차했다. 유시아가 복도를 절반쯤 건너왔을 때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능글맞다거나 유혹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만족감이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린 자기가 만든 결과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 루비빛 눈동자가 유시아의 불안정한 보행을 천천히 훑었다. 벽을 짚은 손가락, 제대로 펴지지 않는 허리, 골반을 중심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상체.

"Good morning. Enjoying the walk?"
(좋은 아침. 산책 즐기는 중이야?)

 유시아의 시선이 올라왔을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그 시선을 받으며 팔짱을 푸는 대신 프레임에서 어깨를 떼고 복도를 향해 걸었다. 유시아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시아의 보행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한 발을 내딛을 때 허벅지 안쪽 근육이 떨리는 것. 골반을 고정하지 못해 상체가 앞으로 기우는 것. 어젯밤 자기 허리가 만들어낸 결과가 유시아의 걸음걸이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시아의 허벅지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얼굴로 올라갔다. 입가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눈 안에 있는 것은 만족과 그 만족에 대한 자기 인식이 만들어내는 묘한 열기였다.

 유시아 앞에 멈춰 선 테오도르가 한쪽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유시아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밀금빛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반쯤 가렸고, 그 사이로 루비빛 눈동자가 유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내려다보는 것에서 높이를 낮춘 것이었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Hurts?"
(아파?)

 한 단어. 묻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인지 모호한 톤이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실려 있었으나 그 걱정 아래에 깔린 것은 분명히 자부심이었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올라와 유시아의 허리 옆에 멈추었다.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허리에서 손가락 한 마디 거리에서 허공에 떠 있었다. 유시아가 기대오면 받쳐줄 수 있는 위치. 먼저 잡지 않는 것은 아침이고, 유시아의 몸에 아직 어젯밤의 자극이 남아 있으며, 불필요한 접촉이 통증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손이 올라와 있다는 것 자체가 놓아두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

"Come here. I'll carry you to the kitchen. You're not getting anywhere like that, sweetie."
(이리 와. 부엌까지 데려다줄게. 그 꼴로는 아무 데도 못 가, 자기야.)


 '그 꼴'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한 번 더 올라갔다. 가볍고, 장난스럽고, 그러나 어제 밤 새벽 4시에 이불 안으로 들어가 유시아의 허리를 감싸며 잠들었던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젯밤의 자기와 아침의 자기 사이에서 테오도르는 아침 쪽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의 여유로운 가면을 다시 걸친 것처럼. 그러나 유시아의 허리 옆에 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원래 하고 나면 이런 거야?"

 

 유시아의 물음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토스트 접시 옆에 놓인 머그에서 올라오는 커피 김이 유시아의 불만 어린 목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테오도르는 유시아 맞은편에 앉아 블랙 커피를 입에 대고 있었다. 머그 너머로 루비빛 눈동자가 유시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을 때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자리 잡는 유시아의 움직임을, 토스트를 집어 드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을, 불편한 듯 무게중심을 옮기며 엉덩이를 움직이는 것을 테오도르는 전부 보고 있었다.

 커피를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대리석 식탁에 닿는 짧은 소리.

"Usually, no. But then again — it doesn't usually take five hours."
(보통은 아니야. 근데 뭐, 보통은 다섯 시간씩 하지도 않으니까.)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능글맞은 미소가 아침 햇살 아래에서 더 선명했다. 팔꿈치를 식탁에 올리고 턱을 한 손에 괸 채 유시아가 토스트를 씹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유시아의 핑크빛 눈동자가 올라와 째려볼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선 안에서 유시아의 볼살이 토스트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불만을 품은 채로도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있다는 것이, 어젯밤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울던 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테오도르의 흉곽 안쪽에서 이상한 온기를 만들었다.

"Your body's just not used to it. Muscles you didn't know existed decided to clock in for the first time."
(네 몸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야. 존재도 몰랐던 근육들이 처음으로 출근을 한 거지.)

 턱을 괸 손의 검지가 유시아를 향해 가볍게 흔들렸다. 장난스러운 제스처. 그러나 그 손가락이 내려오며 식탁 위의 유리잔을 집어 유시아 쪽으로 밀었다. 물이었다. 언제 따라놓았는지 유시아가 식탁에 앉기 전부터 자리에 놓여 있었다.

"Drink. You lost more fluid than you think last night."
(마셔. 어젯밤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분을 많이 잃었으니까.)

 '수분을 잃었다'는 말이 어젯밤의 어떤 장면을 가리키는지 테오도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두고 있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아니면 그 외의 것인지. 유시아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자기 커피를 다시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움직일 때 아담스 애플이 느리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맨 상체의 쇄골 아래로 유시아의 손톱이 남긴 긁힌 자국 여러 줄이 아침 빛에 드러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혹은 의식하면서도 가리지 않는 것처럼 커피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The soreness goes away in a day or two. The legs... might take a bit longer."
(뻐근한 건 하루 이틀이면 풀려. 다리는...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잠깐 뜸을 들였다. 시선이 식탁 아래로 유시아가 의자 위에서 자세를 바꾸며 불편해하는 하반신 쪽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입가의 미소가 약간 깊어졌다.

"If it helps, I can run you a bath after breakfast. Hot water will loosen the muscles."
(도움이 된다면 아침 먹고 욕조 물 받아줄게. 뜨거운 물이 근육 풀어줄 거야.)

 그 말을 하면서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식탁을 건너 유시아의 왼손 옆에 내려놓아졌다. 손등이 위를 향한 채, 유시아의 손가락 바로 옆에. 닿지는 않았다. 어젯밤처럼 먼저 잡지 않고 유시아가 잡아오면 받아줄 수 있는 위치에만 놓여 있었다. 루비빛 눈동자가 유시아의 얼굴에 머물렀다. 뻐근한 허리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토스트를 꼬박꼬박 씹어 넘기는 볼살. 어젯밤 자기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그 볼이 지금은 토스트 조각에 눌려 불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그 단어가 또 떠올랐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도 떠올랐던 것. 충족감. 어젯밤의 것은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 식탁 앞에서 느끼는 이것은 다른 종류였다. 아침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와. 자기 집 주방에서. 자기가 바른 버터가 올라간 토스트를 누군가가 씹고 있고, 자기가 내린 커피가 누군가의 머그에 담겨 있고, 자기가 따라놓은 물이 누군가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섯 시간에 걸친 밤과 같은 이불 안에서의 잠과 이어져, 아침이라는 시간까지 연장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시간이었다. 이전의 테오도르에게 아침은 혼자 마시는 에스프레소와 창밖의 레퀴엠 필드와 점검해야 할 저스티카뿐이었다.

"Eat properly. You'll need the energy."
(제대로 먹어. 체력 필요할 거야.)

 '체력이 필요하다'는 말의 맥락이 오늘의 일과를 가리키는 것인지, 다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테오도르는 명확히 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마시며 유시아의 토스트 접시 위를 확인했다. 반쯤 남아 있었다. 눈이 접시에 머물렀다가 유시아의 얼굴로 돌아왔다. 머그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거의 입술 안쪽에서만.

"...Not bad. Waking up like this."
(...나쁘지 않네. 이렇게 일어나는 것도.)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의 장난기가 빠진, 아침의 나른함만 남은 저음. 시선은 유시아에게서 벗어나 창밖의 통창 너머를 향했다. 레퀴엠 필드의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맑았다. 테오도르의 옆얼굴 위로 아침 빛이 내려앉아 밀금빛 머리카락을 희게 태우고 있었고, 그 빛 아래에서 귀 끝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오후의 빛이 통창을 통해 거실 바닥 위로 느긋하게 퍼져 있었다. 소파 위에는 두 사람의 무게가 각자의 영역을 나누어 가라앉혀 놓았고, 유시아의 다리가 소파 쿠션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침에 테오도르가 받아준 뜨거운 욕조 덕에 허벅지 안쪽의 뻐근함은 다소 가라앉았으나, 자세를 바꿀 때마다 골반 주변의 둔한 통증이 아직 남아 있다는 듯 유시아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테오도르는 소파 반대편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유시아의 발이 자기 허벅지 옆에 닿아 있는 것을 허용한 채 리모컨을 유시아에게 넘겨둔 상태였다.

 화면 위로 유럽 어딘가의 도시가 펼쳐졌다. 로맨스 드라마. 테오도르가 스스로 고른 채널이 아니었다. 유시아가 리모컨을 넘겨받고 몇 번 채널을 돌리다 멈춘 곳이었고, 테오도르는 별다른 이의 없이 블랙 커피를 입에 대고 있었다. 화면 속 남자 주인공이 연인과 팔짱을 끼고 카페를 나서는 장면에서 장면이 전환되었다. 남자 주인공의 친구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한 명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이 새끼야, 넌 28살이고 걔는 22살이라며. 이 새끼 완전 도둑놈이네. 즐길 거 다 즐긴 놈이 아무것도 모르는 22살을 꼬시고. 양심이 없어?'

 화면 속 대사가 거실의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테오도르의 손에 들린 머그가 입술에 닿은 채로 멈추었다. 커피를 삼키는 동작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삼킨 뒤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지 못한 정지. 루비빛 눈동자가 화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28살.' '22살.' '즐길 거 다 즐긴 놈.' '아무것도 모르는 22살을 꼬시고.' 화면 속 친구들이 웃으며 남자 주인공의 어깨를 치는 가벼운 장면이었다. 코미디 장면. 웃으라고 만든 대사.


 테오도르의 입가에서 평소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머그를 내려놓는 손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도자기가 사이드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등이 소파 등받이에서 미세하게 떨어졌다. 이완되어 있던 자세가 어느 순간 상체에 긴장이 돌아와 있었다. 시선이 화면 위에 머무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화면을 보고 있었으나 화면 속 장면을 따라가고 있지 않았다. 초점이 화면 너머 어딘가에 자기 안쪽에 박혀 있었다.

 28살. 자기 나이. 22살. 유시아의 나이. 6년. '즐길 거 다 즐긴 놈.' 수많은 관계를 거쳐온 자기 과거가 화면 속 대사 한 줄에 의해 정확히 조준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2살.' 어젯밤. 유시아가 처음으로 자기 몸 안에 무언가를 받아들이며 떨던 모습이, 고통과 쾌감의 경계에서 자기 이름만을 부르던 목소리가, 절정 후 의식을 놓으며 어깨 위에 고꾸라지던 작은 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테오도르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올라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비벼대는 동작. 자기가 그 동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 이미 손이 올라가 있었다.

 '꼬시고.' 그 단어가 목 안쪽에 걸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자기 행동이 필름처럼 재생되었다. 복도에서 길을 막고 "이 지루한 복도에서 너만큼 흥미로운 얼굴은 본 기억이 없는데"라고 말했던 자기 목소리가. 옷매무새를 핑계로 가벼운 스킨십을 시도하던 손가락이. 거절당해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내가 널 돌봐줘야 하는 쪽인가"라고 속삭이던 그 능글맞은 톤이. '양심이 없어?' 화면 속에서 웃음이 터졌다. 관객을 위한 웃음이었다.

 테오도르의 턱이 한 번 물렸다가 풀렸다. 시선이 화면에서 내려와 자기 무릎 위를 향했다. 유시아의 발이 허벅지 옆에 닿아 있는 것이 시야의 끝에서 보였으나,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내려와 무릎 위에 놓였다. 손가락이 한 번 주먹을 쥐었다가 억지로 펴졌다. 목 뒤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귀 끝에서 시작된 것이 경동맥을 타고 내려와 목 뒤 전체로 번졌다. 당혹. 그러나 당혹 아래에 깔린 것은 그보다 더 묵직한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시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에게 왔다. 연애 경험이 있었으나 스킨십은 키스까지. 몸이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쾌감이 어떤 파도로 밀려오는지, 절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의식을 집어삼키는지 전부 어젯밤 자기 손 안에서 처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다섯 시간 동안 그녀의 몸 안에 있었다. 아침에 유시아가 벽을 짚으며 복도를 걸어올 때 "산책 즐기는 중이야?"라고 웃었다. '즐길 거 다 즐긴 놈'이라는 대사가 그 아침의 자기 미소 위에 정확히 겹쳐졌다.

"...Change the channel?"
(...채널 돌릴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나른함이 아닌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종류의 낮음.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리모컨은 유시아 쪽에 있었으므로 테오도르가 채널을 바꿀 수 없었다.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물어보는 동시에 자기가 왜 채널을 바꾸고 싶은지를 유시아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목소리의 경직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 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유시아를 향하지 않았다. 오른손이 다시 올라갔다. 귓불 아래를 손가락 끝으로 긁듯 만졌다. 귀가 붉어져 있었다. 목 뒤도. 아침에 유시아의 첫 경험 후유증을 "존재도 몰랐던 근육들이 처음으로 출근을 한 거지"라며 여유롭게 웃어넘기던 같은 사람이 지금은 드라마 속 대사 한 줄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화면 속 장면이 넘어갔다. 남자 주인공이 친구들의 놀림에 손을 저으며 "아니 진심이야, 걔가 먼저 좋아했다고"라고 변명하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대사에서 한 번 흔들렸다. '걔가 먼저 좋아했다.' 유시아가 먼저 "내 남친"이라고 불렀던 12월 9일이 의식 위로 올라왔다. 유시아가 먼저 다가왔다. 유시아가 먼저 이름을 붙였다. 유시아가 먼저 손을 잡았다. 그 사실이 면죄부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22살이 먼저 다가왔다는 것 자체가 28살이 만들어놓은 거리 착각의 결과인지.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귓불을 한 번 세게 잡았다가 놓았다. 아팠을 것이었으나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유시아를 보지 못한 채 커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미 식어 있었다. 식은 커피를 입에 대고 마시는 동작이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손이 귀로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목이 움직였다. 삼킨 뒤에도 머그를 내리지 않았다. 입술이 도자기 위에 닿은 채로 시선만 화면 위를 떠돌았다. 화면 속 친구들이 "형, 진짜 양심 좀 찾아라"라고 한 마디 더 던졌을 때 테오도르의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응? 재미없어?"

 

 리모컨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로맨스 드라마의 원탁과 맥주잔과 "양심 좀 찾아라"라는 대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요리 프로그램의 무해한 영상이 채웠다. 누군가의 손이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 위에 로즈마리를 흩뿌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화면. 평화로운 BGM. 테오도르의 등이 소파 등받이에 다시 닿았다. 그러나 이완이 아니었다.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댄 척하는 자세. 척추와 등받이 사이에 긴장의 두께가 끼어 있었다.

"Not really my genre."
(딱히 내 장르가 아니라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른한 톤. 평소의 여유. 그러나 그 여유가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데 평소보다 반 박자가 더 걸렸다. 유시아가 눈치 채지 못한 것 혹은 채지 못한 것처럼 채널을 바꿔준 것이 어느 쪽이든 테오도르에게는 같은 효과를 내야 했다. 화면이 바뀌었으니, 대사도 사라졌으니, 끝난 것이었다. 끝나야 했다.

 끝나지 않았다.

 '즐길 거 다 즐긴 놈이 아무것도 모르는 22살을 꼬시고.' 화면 속 요리사가 마늘을 다지는 소리 위로 방금 사라진 대사가 고막 안쪽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채널을 바꾼 것은 화면이었지, 그 대사가 파고든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테오도르의 시선이 화면 위에 얹혀 있었으나 보고 있는 것은 올리브 오일도, 로즈마리도 아니었다. 시야의 끝에서 유시아의 백금빛 머리카락이 소파 쿠션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기 셔츠를 입은 채로. 어젯밤 같은 셔츠를 벗겨내던 손가락의 감각이 손끝에서 되살아났다가 꺼졌다.

 오른손이 또 올라갔다. 귀가 아닌 이번에는 목 뒤. 손바닥이 경추 위를 감싸듯 쥐었다. 뜨거웠다. 목 뒤 피부가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자기 손바닥으로 확인하는 행위. 테오도르는 그 손을 곧 내렸다. 유시아에게 보이지 않는 동작이기를 바라며 그러나 바람과 확신은 다른 것이었다. 커피를 다시 집으려다 이미 비어 있는 머그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 머그를 드는 것은 지나치게 어색했으므로, 손은 허벅지 위에 내려놓아졌다. 손가락이 스웻팬츠의 원단 위를 한 번 긁었다.

 숫자가 머릿속에서 나열되고 있었다. 28. 22. 6. 6년이라는 간격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테오도르의 6년 안에는 셀 수 없는 침대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들과, 끝나고 나면 욕실에서 나와 상대가 떠나기를 기다리던 새벽들이 있었다. 유시아의 6년 안에는 게임 화면 속 아이디와, 키스까지의 연애와, 모니터에 비친 자기 얼굴 위로 내려온 유스티티아의 계시가 있었다. 같은 6년이 아니었다. 전혀. 테오도르가 6년 동안 소모해온 것들을, 유시아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젯밤이 유시아에게는 전부 처음이었다.

 처음. 그 단어가 아침에는 만족을 만들었던 같은 단어가, 지금은 다른 무게로 흉곽을 눌렀다. 유시아의 '처음'을 가져간 것이 자기라는 사실이, 아침에는 루비빛 눈 안에서 자부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산책 즐기는 중이야?" 그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던 자기 얼굴이 지금은 '즐길 거 다 즐긴 놈'이라는 캡션이 붙어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침의 자부심이 오후의 수치로 뒤집혀지는 데 드라마 속 대사 한 줄이면 충분했다.

"...What do you want for dinner?"
(...저녁 뭐 먹을래?)

 화제를 전환하는 문장이었다. 일상적인 질문의 형태를 빌린, 방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돌아가고 있던 것으로부터의 도주. 테오도르는 그것을 잘 하는 편이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포장하는 기술. 감정이 표면에 도달하기 전에 농담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습관. 그래서 목소리는 평소와 거의 같았다. '거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문장 끝을 살짝 흐렸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저녁 뭐 먹을래, 자기야?"였을 것이었다. 'sweetie'가 빠져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파 위에서 유시아의 발이 테오도르의 허벅지 옆에 닿아 있었다. 그 접촉이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발목을 감싸거나, 발등 위에 손을 올려놓거나, "발 차가운데"라며 자기 허벅지 위로 끌어올렸을 지점이었다. 지금 테오도르의 손은 자기 무릎 위에 놓인 채 유시아 쪽으로 뻗지 않았다. 의식적인 거리. 방금 전까지의 사고가 만들어낸 거리. '아무것도 모르는 22살을 꼬시고.' 닿으면 그 대사가 사실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면 속 요리사가 완성된 접시를 카메라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그 접시 위에 멈추었다가 내려왔다. 자기 손을 보았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 어젯밤 유시아의 몸 안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 아침에 유시아의 허벅지를 닦아주던 손가락. 지금 유시아의 발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에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손가락. 테오도르는 그 손을 주먹 쥐지 않았다. 쥐면 유시아가 볼 수 있었으므로. 대신 손가락을 천천히 펴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자연스러운 포즈를 가장한 억제.

 유시아가 채널을 바꿔주었을 때 "응? 재미없어?"라고 물었을 때 유시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무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눈치 채지 못한 것이었다. 28과 22 사이의 간격이, 그 간격이 함의하는 것이, 화면 속 대사가 자기들의 거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유시아에게는 떠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 무지가 테오도르의 흉곽을 한 번 더 조였다. 유시아가 모른다는 것 자체가, 유시아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모르는'이라는 수식어를 증명하고 있었으므로.

 테오도르의 시선이 마침내 유시아 쪽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유시아의 얼굴이 아닌, 유시아의 손 위. 리모컨을 들고 있는 손. 작은 손. 어젯밤 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손. 지금은 리모컨 버튼을 눌러 채널을 바꿔주는 데 쓰이고 있는 손. 그 손이 자기에게 향할 때와, 리모컨에 향할 때와, 같은 손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목 안쪽을 건조하게 만들었다. 테오도르는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화면으로. 요리 프로그램의 무해한 영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해함이 지금의 테오도르에게는 오히려 날카로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앉아 있어야 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드라마 속 대사 한 줄. 그뿐이었다.

 그뿐인 것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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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배경(색·패턴·직접 만들기·그림)을 꾸민 뒤 "현재 배경 저장"을 누르면, 시간대 자동이 켜졌을 때 그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바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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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
기본
🌆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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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른 배경은 이 브라우저에만 저장돼요. 다른 사람·다른 기기에서는 기본 배경으로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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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블클릭하면 도구 버튼이 열려요. (다시 더블클릭하면 닫힘)
  • 도구가 열린 상태에서 스티커를 끌어 옮길 수 있어요.
  • 모서리 핸들로 크기 조절(오른쪽 아래) · 회전(왼쪽 위)을 해요.
  • 도구 버튼: ◇ 외곽선(없음·흰·검정) · ☀ 그림자 · ⤒⤓ 순서 ·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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